CPTSD에서도 공조절이 가능한 이유
사람들은 종종 말한다. “그 사람 착하잖아. 너에게 해를 끼치지 않을 사람이잖아.” 그래서 괜찮지 않겠냐고. 안전하다고 생각하면 편해질 수 있지 않겠냐고. 하지만 내 몸은 말한다. “아니.” 안전은 이해로 도달하는 게 아니다. 안전은 몸이 느끼는 것이다.
트라우마 이후 내 몸은 위험을 먼저 감지하는 쪽으로 기본값이 바뀌었다. 이것이 후성유전, 메틸화가 만들어낸 변화다. 하지만 이것은 기능의 소멸이 아니다. 안전의 감각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안전을 감지하려면 훨씬 강한 신호가 필요해진 것이다. 내 몸은 위험을 과장해서 듣는다. 그러나 동시에, 안전을 들을 수 있는 귀 역시 여전히 남아 있다.
우리는 감정을 스스로 완벽하게 다룰 수 있는 존재라고 믿는다. 하지만 인간은 태초부터 공조절을 기반으로 살아온 생명체다.
누군가의 호흡에 맞춰 내 호흡이 완만해지고
누군가의 목소리로 내 심박수가 느려지고
누군가의 눈빛으로 경계가 풀리고
우리는 서로의 신경계를 무의식적으로 조율하며 살아간다. 안전은 말로 설득하는 게 아니라, 몸과 몸 사이에서 전달된다.
그건 기적이 아니다. 그건 연애 감정 때문도 아니고, 의지도 아니고, 최면도 아니다. 그 순간, 내 몸이 안전 신호를 받은 것이다. 부교감신경이 작동하고, 과각성 모드가 해제되고, 숨이 깊어지고, 가슴이 열리고, 다리가 땅에 닿는 감각이 돌아온다. 내 몸은 여전히 안전해질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단지 너무 오래, 혼자 버텼을 뿐이었다. 사람이 떠난 자리에서 경계만 남은 몸으로 살아남아야 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어떤 순간, 어떤 사람, 어떤 관계 안에서 내 몸은 다시 부드러워질 수 있었다. 이 사실 하나면 충분하다. 나는 다시 돌아갈 수 있는 몸을 가지고 있다. 나는 여전히 연결될 수 있는 존재다. 회복은 가능성이 아니라, 이미 내 안에 남아 있는 능력이었다.
#생각번호20251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