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정은 사라지는 감정이 아니라, 귀환하는 몸이다

익숙함이 무뎌지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자리 잡는 과정에 대하여

by 민진성 mola mola

안정에 익숙해지면 사라지는 걸까?

어느 날 이런 생각이 들었다. “지금 느끼는 이 안정감도, 결국 익숙해지면 무뎌지는 걸까?” 처음의 편안함은 너무 선명하다. 숨이 깊어지고, 가슴이 열리고, 세상이 부드럽게 흐른다. 그 대비가 너무 강렬해서, 나는 그걸 잃을까 봐 두려웠다. 마치 어떤 사람 옆에서만 가능한 특별한 상태처럼 느껴지니까. 그래서 더 조심스럽고, 더 불안해진다.



하지만 안정은 ‘쾌락’과는 다른 종류의 감각이다

쾌락은 반복될수록 무뎌진다. 더 큰 자극을 필요로 하고, 조금만 줄어들어도 허전함이 찾아온다. 그것이 한계효용의 법칙이다. 하지만 안정은 쾌락이 아니다. 안정은 몸이 원래 있어야 할 생리적 자리다. 심장 박동이 정돈되고, 호흡이 깊어지고, 신경계가 평형을 찾는 상태. 안정은 ‘더 강해야 유지되는 감각’이 아니라, 덜 해도 유지될 수 있는 감각이다.



처음에는 그 안정감을 누군가에게서 ‘빌려온다’

CPTSD 이후의 몸은 혼자서 안전을 감지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초기에 안정은 어떤 사람을 통해 외부로부터 들어온다. 그 사람의 말투, 호흡, 시선, 태도. 그 모든 것이 내 신경계에 “괜찮아”라는 신호를 보낸다. 이때 느끼는 안정은 강렬하다. 불안에서 안정으로 넘어가는 전환의 대비가 극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착각한다. “이 사람과 있어야만 나는 편안할 수 있구나.”



하지만 반복이 쌓이면 안정은 ‘내 것’이 된다

공조절을 통해 들어온 안정이 신경계 내부에서 기억으로 남기 시작한다. 처음엔 그 사람이 필요했지만, 나중에는 그 사람이 없어도 몸이 자기 조절을 할 수 있게 된다. 안정은 빌려쓰는 것이 아니라, 천천히 내 신경계의 기본값으로 재설정되는 과정이다. 익숙해지는 것은 무뎌지는 것이 아니라, 안정이 튀어오르는 예외가 아니라 기본값으로 내려오는 과정이다.



그래서 안정은 사라지는 감정이 아니라 ‘귀환’이다

처음의 안정이 선명한 건 너무 오랫동안 그 감각을 잃고 있었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나며 그 선명함이 조금 줄어드는 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그 감각이 일상이 되어가고 있다는 뜻이다. 안정은 특별했던 순간이 아니라, 내가 돌아갈 수 있는 자리다. 이제는 알 것 같다. 나는 안정에 중독되는 것이 아니라, 안정을 기억해내고 있는 중이라는 것을.




#생각번호2025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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