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은 안 되는데, 어떤 후배는 되는 이유
나는 어떤 사람과 함께 있을 때 CPTSD가 없었던 것처럼 편안해진다. 숨이 깊어지고, 가슴이 열리고, 말이 자연스럽게 나온다. 반대로, 어떤 사람과 함께 있을 때는 금방 과각성으로 올라간다. 가슴이 조이고, 생각이 빨라지고, 말이 끊어진다. 그리고 이상했다. 가족과 있을 때는 더 힘든데, 오히려 그렇게까지 친하지는 않지만, 어쩐지 좋아지고 싶은 대학 후배와 있을 때는 내 몸이 편안했다. 왜 그럴까?
사람들은 말한다. “가족이니까 더 편해야지.”, “좋은 사람이면 불안할 이유가 없잖아.” 하지만 내 몸은 다르게 반응한다. 안전은 도덕적 평가가 아니라 신경계 반응이다. 안전은 머리가 아니라 몸이 결정한다.
CPTSD는 관계 속에서 생긴 외상이다. 특히 가족, 양육자, 가까웠던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그래서 가족과 함께 있을 때 몸은 이렇게 말한다. 이 관계는 위험할 수 있어. 과거의 패턴이 반복될 수 있어. 긴장을 유지해야 한다. 이건 의식적인 판단이 아니라 신체 기억(implicit memory) 이다. 그래서 아무리 “괜찮아졌어”라고 말해도 몸은 듣지 않는다. 가족과 함께 있을 때 힘든 건 사랑이 없어서가 아니라, 몸이 그 관계를 “경계해야 하는 관계”로 저장했기 때문이다.
그 사람은 내 페이스를 침범하지 않았다. 말투가 부드럽고, 시선이 과하지 않았고, 내 감정을 분석하거나 규정하려 하지 않았다. 그 사람은 나를 “도와야 할 대상”도, “바꾸어야 할 존재”도 아니었다. 그냥 하나의 사람으로 대했다. 그 미세한 차이가 내 신경계에게는 이렇게 들렸다. 여기는 싸울 필요도, 버텨낼 필요도 없다. 그냥 존재해도 된다. 그리고 몸은 즉시 안정 모드로 전환되었다.
나를 바꾸려 하지 않는 사람
내가 어떻게 느끼는지 판단하지 않는 사람
관계의 속도를 강요하지 않는 사람
나에게 자율성을 남겨두는 사람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나’인 상태로 있어도 괜찮다고 느끼게 하는 사람. 그게 안전이다.
나는 사람을 싫어하는 게 아니었다. 나는 관계가 불가능한 게 아니었다. 내 몸은 그냥 위협이 아닌 관계를 다시 경험할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후배는 내 회복을 “만든” 사람이 아니라, 내 안에 남아 있던 회복 능력을 다시 여는 열쇠였다. 그리고 그 사실이 나를 살렸다.
#생각번호20251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