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PTSD를 겪고 있는 나는 가끔 이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곤 한다. “내가 겪은 복합 외상이 혹시라도 나에게 어떤 취약성을 남긴 건 아닐까?”, “그 취약성을 인정하는 것이 내 정체성을 부정하는 일은 아닐까?”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이 두 질문이 서로 다른 영역의 것임을 알게 되었다.
과학적 경향은 ‘사실’이고, 사실은 낙인이 아니다
폭력, 방임, 만성적 스트레스를 겪은 사람들은 그 이후 삶에서 더 많은 위험 요인을 가진다. 이것은 부정할 수도, 감정적으로 덮어둘 수도 없는 과학적 사실이다. 위험 요인이 높다는 말은 그 사람이 ‘그렇게 된다’는 예언이 아니라 경향성을 설명하는 것이다.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경향성을 ‘예언’처럼 받아들이고, 사실을 ‘정체성’이라고 착각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통계적 사실은 나라는 사람의 본질을 말해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진 조건을 말해줄 뿐이다.
경향을 인정하는 것은 자기 비난이 아니라 자기 이해다
나는 CPTSD를 겪는다. 이 사실을 인정한다고 해서 내가 위험한 사람이라는 뜻은 아니다. 그 대신 이것은 내가 어떤 신경계적 패턴을 더 주의해야 하는지, 어떤 환경에서 더 취약할 수 있는지, 어떤 상황을 피하고 관리해야 하는지를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취약성은 ‘본질’이 아니라 ‘조건’이다. 조건은 바꿀 수 있고 관리할 수 있다. 그러니 취약성을 인정한다고 해서 내 자아정체성이 훼손되는 것은 아니다.
취약성을 부정하는 것이 오히려 나를 위험하게 만든다
이상하게 들릴지 몰라도 진짜 위험은 “나는 취약하지 않아”라고 생각할 때 찾아온다. 취약성을 인정하지 않으면 내가 어떤 경로에서 무너질 수 있는지 보이지 않는다. 그러면 대비할 수 없고, 구조를 만들 수 없다. 반대로 말하면 취약성을 인정하는 행위는 내가 나를 지키기 위한 설계자가 되는 과정이다. 나는 위험요인을 자각함으로써 오히려 더 안전해진다.
취약성 인정은 자아정체성 부정이 아니라 자기 권한 회복이다
취약성을 인정하는 순간 나는 더 이상 “수동적 존재”가 아니라 내 문제를 인식하고 관리하는 능동적 존재가 된다.
나는 더 쉽게 고립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기에
더 의도적으로 사회적 연결을 유지한다.
나는 신경계가 과민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기에
더 세밀하게 감각을 조절한다.
나는 특정 종류의 스트레스가 위험하다는 사실을 알기에
더 건강한 환경을 선택한다.
취약성을 회피하는 사람보다 취약성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훨씬 더 강하고, 더 자유롭고, 더 안정적이다.
사실을 인정하는 것은 나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해방하는 일이다
나는 CPTSD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로 인해 갖게 된 취약성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것을 인정한다고 해서 나는 나를 비하하는 것도, 낙인찍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내가 나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언어다. 취약성을 인정하면 선택의 자유가 커진다. 내가 나를 지킬 수 있게 된다. 나는 더 강해진다.
#생각번호202511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