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양극성 2형(Bipolar II) 진단을 받았다. 처음 이 사실을 마주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이런 것이었다. “그럼 우리 집안에도 이런 기질이 있었던 걸까?”, “부모님이나 조부모 세대에서 누군가 살아오며 힘들어하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나는 그 연장선 위에 서 있는 걸까?” 이 질문은 나를 불안하게 하기보다 어쩐지 묘하게 나를 진정시켰다. 유전으로 설명되는 부분이 있다면, 내 삶의 일부는 더 이상 ‘내 탓’이 아니게 되는 것 같아서.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걸 “숙명”이라고 부르는 것도 싫었다. 그래서 나는 차분하게 양극성 장애의 유전적 연구를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유전된다”는 말은 병이 복제된다는 뜻이 아니다
양극성 장애는 유전적 요인이 비교적 높은 편이다. 연구에 따르면 유전율은 60~80% 사이로 보고된다. 그런데 이 숫자를 잘못 이해하면 마치 병이 그대로 옮겨지는 것처럼 들린다. 하지만 유전 연구가 말하는 것은 전혀 다르다. 유전되는 것은 ‘취약성’이고 발병은 환경과 경험, 성장 과정이 결정한다. 즉, 부모가 양극성이었다면 자녀가 반드시 양극성이 되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부모가 전혀 그렇지 않아 보였어도 자녀에게 발현될 수 있다. 병은 DNA로 결정되지 않는다. 병은 조건으로 나타난다.
윗세대는 진단을 받지 않고 살았다
나는 한 가지 사실을 떠올렸다. 우리 부모 세대, 조부모 세대는 지금과 같은 정신과 체계가 없었다.
기분 변화는 “성격”이라고 불렸다.
우울은 “나약함”이라고 여겨졌다.
경조증은 “에너지 좋은 사람” 정도로 넘겼다.
분노 폭발은 “기질”이라 불렸다.
수면장애는 “스트레스 때문”이라고 덮였다.
지금이라면 진단이 가능한 패턴들이 그 시대에는 진단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그러니 “우리 가족 중 누구도 그런 적 없어”라는 말은 사실 “진단받은 사람은 없었다”는 뜻일 뿐이다. 그 안에 어떤 기질이 흐르고 있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기질은 ‘병’이 아니라 ‘가계의 색깔’ 같은 것이다
나는 가족을 떠올렸다. 감정이 흘러넘치는 사람, 침묵 속에서 감정을 눌러버리는 사람, 갑자기 몰아치는 일 중독, 주기적 번아웃, 자기비난과 과도한 책임감. 이런 것들은 병이 아니라 스펙트럼이다. 양극성 장애는 뚜렷한 경계로 나뉘는 것이 아니라 원래 가족이 가진 정서적 패턴 위에 얹혀 나타난다. 그리고 그 패턴은 누구에게는 평생 기질로만 남고, 누구에게는 환경적 압력과 트라우마를 만나 진단으로 이어진다. 가족의 기질은 병의 씨앗이 아니라 가능성의 땅이다. 그 땅에서 무엇이 자랄지는 유전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트라우마는 그 땅을 더 민감하게 만든다
나는 CPTSD가 있다. 오랫동안 지속된 폭력, 공포, 경계 속에서 신경계가 민감하게 길들여졌다. 이런 환경은 원래 있던 유전적 취약성을 더 쉽게 드러나게 한다. 그러니까 내 양극성 2형은 “누군가에게서 유전된 병”이 아니라 내가 겪은 환경, 경험, 생존 방식이 유전적 가능성을 ‘현실’로 만든 것에 가깝다. 그래서 이것은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나는 내 연속성 속에서 나를 이해하고 싶다
나는 가족에게서 병을 찾으려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를 원망하기 위해서도 아니다. 다만 이렇게 생각한다. 내가 누구인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내가 어떤 조건에서 태어났고 어떤 환경에서 자라왔는지를 알아야 한다. 유전적 취약성은 나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어떤 길을 조심해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하나의 표식일 뿐이다. 그래서 나는 묻는다. “우리 가족 중에도 비슷한 기질이 있었을까?”, “누군가 말하지 못한 채 평생을 버틴 건 아닐까?”, “그들의 어둠을 내가 이어받은 대신 나는 이걸 언어로 만들 수 있는 사람이 된 건 아닐까?” 어쩌면 나는 처음으로 이 흐름을 의식적으로 바라보는 가족 중 한 사람일지 모른다.
#생각번호202511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