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가치유는 언제나 옳은가

술과 글쓰기 사이, 고통을 다루는 두 가지 방식

by 민진성 mola mola

자가치유는 언제나 옳은가

우리는 자주 이렇게 말한다. “그건 자가치유야.” 마치 그 말이 모든 설명이자 면책인 것처럼. 하지만 정말 그럴까. 술을 마시는 것도 자가치유이고, 글을 쓰는 것도 자가치유라면, 자가치유란 도대체 무엇을 가리키는 말일까.



자가치유는 선한 행동이 아니다

자가치유는 흔히 건강한 선택, 의식적인 회복 노력, 긍정적인 행동으로 오해된다. 하지만 실제로 자가치유는 그보다 훨씬 중립적인 개념이다. 자가치유란, 외부의 개입이 충분하지 않을 때 사람이 스스로 고통을 조절하려는 모든 시도다. 여기에는 술도 있고, 약물도 있고, 폭식도 있고, 글쓰기와 운동, 과도한 일, 고립도 포함된다. 좋고 나쁨은 이 개념의 바깥에 있다.



술은 자가치유인가

그렇다. 적어도 처음에는. 술은 불안을 낮추고, 과각성을 진정시키며, 지금 이 순간을 버틸 수 있게 해준다. 오늘을 넘기기 위해, 잠시 머리를 끄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술을 선택한다. 이때 술은 타락의 상징이 아니라 즉각적인 조절 도구다. 문제는 그것이 얼마나 오래, 얼마나 자주 사용되느냐에 있다.



자가치유에는 두 가지 방향이 있다

자가치유는 하나의 형태가 아니다. 적어도 두 갈래로 나뉜다. 하나는 고통을 덮는 방식이다. 즉각적인 효과가 있고, 노력 대비 효율이 높다. 대신 고통은 처리되지 않은 채 남는다. 다른 하나는 고통을 통과시키는 방식이다. 불편함을 견뎌야 하고, 즉각적인 보상은 적다. 대신 경험은 의미로 바뀌고, 기억은 정리된다. 둘 다 자가치유다. 다만 작동 방식이 다를 뿐이다.



글쓰기는 왜 다른 종류의 자가치유인가

글을 쓴다는 것은 감각을 언어로 옮기고, 혼란을 구조로 재배열하는 일이다. 말해지지 않은 경험은 현재형으로 남지만, 언어화된 경험은 과거형으로 이동한다. 그래서 글쓰기는 기억을 저장하는 방식 자체를 바꾼다. 고통은 사라지지 않지만, 다루어질 수 있는 것이 된다. 이 점에서 글쓰기는 고통을 통과시키는 자가치유에 가깝다.



그러나 글쓰기 역시 실패할 수 있다

글쓰기가 언제나 치유가 되는 것은 아니다. 끝없는 반추, 변화 없는 반복 서사, 고통을 미학으로 고착시키는 글쓰기. 이때 글은 통합이 아니라 다른 형태의 순환이 된다. 도구의 문제가 아니라 작동 방식의 문제다.



자가치유를 가르는 기준

자가치유를 판단하는 기준은 의외로 단순하다. 이 행동이 나의 조절 능력을 넓히는가, 아니면 줄이는가. 장기적으로 조절 능력을 확장시키는가, 아니면 선택지를 좁히는가. 술은 종종 단기적인 조절을 주고 장기적인 조절을 빼앗는다. 글쓰기는 단기적으로 불편하지만 장기적인 조절을 남긴다. 그래서 둘은 같은 자가치유가 아니다.



가장 손에 잡히는 것을 먼저 쓴다

사람은 언제나 가장 손에 잡히는 자가치유부터 사용한다. 다른 선택지가 없을 때, 누군가를 도와줄 사람이 없을 때, 지금 당장 버텨야 할 때. 이 사실을 이해하지 않으면 우리는 너무 쉽게 비난하게 된다. 그리고 회복은 설계되지 않는다.



자가치유는 도덕의 문제가 아니다

자가치유는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살아남기 위한 시도다. 문제는 그 시도가 사람을 더 넓은 선택지로 데려가는지, 아니면 점점 더 좁은 방으로 밀어 넣는지에 있다. 그래서 우리는 묻는 쪽을 선택해야 한다. 판단이 아니라 질문을. 그 질문이 누군가를 덜 다치게 만든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생각번호2025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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