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은 스스로를 악이라 말하지 않는다
악은 자신을 악이라고 소개하지 않는다. 폭력은 “필요한 조치”가 되고, 배제는 “합리적 판단”이 되며, 처벌은 “정의의 실행”이 된다. 역사 속의 재앙들은 대부분 잔혹함이 아니라 확신에서 출발했다. 그 확신은 늘 이렇게 말한다. “이건 옳다.”, “의심할 필요가 없다.”, “반대하는 쪽이 문제다.” 선이 위험해지는 순간은, 그 선이 스스로를 증명할 필요가 없다고 믿을 때다.
우생학은 악의 언어를 쓰지 않았다. 그것은 언제나 개선, 발전, 미래를 말했다. 20세기 초, 우생학은 과학이었다. 통계와 유전학, 합리성과 효율의 언어를 입고 등장했다. 문제는 이 과학이 사람을 수치로 환원했다는 데 있다. 누가 더 생산적인가 누가 사회에 부담이 되는가 누가 ‘건강한 유전자’를 가졌는가 이 질문들은 처음부터 폭력적으로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매우 이성적이고, 책임감 있어 보였다. 그래서 우생학은 이렇게 말할 수 있었다. “우리는 누구도 미워하지 않는다. 다만 사회 전체를 위해 선택할 뿐이다.” 이때 선의 자기 확신이 작동한다. 개인의 고통은 통계적 오차가 되고, 강제 불임은 사회적 비용 절감이 되며, 차별은 객관적 판단으로 둔갑한다. 우생학의 가장 위험한 점은 잔인함이 아니라 도덕적 평온함이었다. 가해자들은 분노하지 않았다. 그들은 “옳은 일을 하고 있다”고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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