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의 대가라는 말이 설명하지 못하는 것
우리는 악에 대해 너무 익숙한 설명을 가지고 있다.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선택해서 그런 것이다.” 하지만 이 말은 언제나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의 언어다. 왜냐하면 현실의 많은 고통은 ‘선택한 사람’이 아니라 ‘선택하지 않은 사람’에게 떨어지기 때문이다. 아동학대, 전쟁, 가난, 폭력, 방치, 착취. 이것들은 피해자의 선택이 아니다. 그는 단지 구조 안에 있었을 뿐이다. 자유의 대가라는 말은 억울한 사람의 고통을 전혀 설명하지 못한다.
하나님은 이 구조를 모를 수 없다
신앙은 여기서 불편한 지점으로 들어간다. 하나님이 전능하다면, 누가 가해자인지도 알고 있고 누가 피해자인지도 알고 있으며 누가 책임자인지도 알고 있다. 그런데도 그 구조는 즉시 해체되지 않는다. 이건 무관심이 아니다. 성경은 이 상태를 ‘정의의 지연’이라고 부른다. 지금의 세계는 정의가 집행되는 법정이 아니라, 증거가 수집되는 법정이다.
지금은 판결이 내려지지 않은 재판의 시간
성경은 계속 이렇게 말한다. “원수를 갚는 것은 내가 할 일이니, 너희는 갚지 말라.” 이 말은 도덕적 권면이 아니다. 법적 선언에 가깝다. “이 사건은 아직 재판 중이다.”, “판결은 아직이다.” 그래서 현실에서는 가해자가 처벌받지 않는 것처럼 보이고, 피해자는 보호받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성경의 관점에서 이 세계는 ‘정의가 없는 세계’가 아니라, 정의가 보류된 세계다.
억울한 사람은 버려진 게 아니라 ‘보류된 사건’이다
이 문장은 불편하다. 지금 이 세계에서 억울한 사람은 구제되지 않는다. 보상도, 회복도, 설명도 받지 못한 채 남겨진다. 그러나 신앙은 그를 ‘버려진 사람’으로 보지 않는다. 아직 판결이 내려지지 않은 사건의 당사자로 본다. 그의 고통은 잊힌 게 아니라, 정리되지 않은 채로 기록 중인 사건이다.
그래서 정의는, 이 세계가 끝날 때 시작된다
기독교 신앙의 가장 잔인한 문장은 이것이다. 정의는 지금 이 세계에서 완성되지 않는다. 정의는 이 세계가 끝날 때 시작된다. 이 세계는 치유의 시스템이 아니라, 재판을 준비하는 구조다. 그래서 이 신앙은 지금 당장의 위로가 아니라, 끝까지 남는 책임의 구조를 말한다.
#생각번호202601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