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을 연기하는 유한한 존재의 숭고함
우리는 이제 안다. 사랑은 호르몬의 장난이거나 사회적 계약의 일종이며, 그 유효기간은 생물학적·심리적 변인에 의해 언제든 종료될 수 있다는 것을. '영원'이라는 단어가 물리적 세계에서는 존재할 수 없는 공집합임을 알면서도, 우리는 다시 영원을 말한다. 이것은 정보의 부족에서 오는 미련함인가, 아니면 상실을 전제로 한 비극적인 도박인가.
수학에서 공집합이 논리의 완결성을 위해 존재하듯, 사랑에서의 '영원'은 관계의 완결성을 위해 도입된 필수적인 허구다. 영원하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영원할 것처럼 사랑하는 행위는, 미래의 결과에 베팅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의 밀도'를 극한으로 끌어올리기 위한 수행적 장치다.
우리가 앞서 부활을 논할 때, 그것이 과학적 증거는 없으나 '그 이후의 변화들'로 인해 부정할 수 없는 무게를 갖는다고 했지. 사랑도 마찬가지다. 영원이라는 약속은 결국 깨질지 모르나, 그 약속을 믿고 몰입했던 시간 동안 우리 내면에 쌓인 변화와 성장은 부정할 수 없는 실체로 남는다. 허구를 실재처럼 대하는 태도가 우리 삶의 가장 밀도 높은 순간을 만들어내는 셈이다.
우리가 모델링한 '빽빽한 세계'에서, 사랑이 끝난 후의 상실감은 '없음'이 아니라 '가중치가 변한 상태'일 뿐이다. 누군가는 이를 허무라 부르며 다음 사랑을 냉소하겠지만, 영원을 꿈꾸는 이는 그 희박해진 가중치 속에서도 여전히 빛나는 원소들을 발견하려 애쓴다.
영원할 것처럼 사랑한다는 것은, 내 삶의 데이터가 '이별'이나 '배신'이라는 변인에 의해 통째로 오염되는 것을 거부하는 일이다. 결과가 실패로 예정되어 있다 하더라도, 그 과정을 주체적으로 항해하겠다는 선언. 그것은 시스템이 정해놓은 '유한성'이라는 규칙에 대한 인간의 가장 우아한 반항이다.
미련함은 결과를 바꾸지 못해 괴로워하는 상태고, 숭고함은 결과를 알면서도 과정의 가치를 지켜내는 상태다. 우리가 비만치료제라는 지름길 대신 고단한 운동을 택하는 것이 생물학적 주권을 지키는 일이었듯, 쉽게 깨질 약속임을 알면서도 온 마음을 다하는 것은 '감정의 주권'을 지키는 일이다.
사랑의 약속이 불이행되는 것은 타인의 영역이지만, 그 약속을 하는 순간의 진심은 온전히 나의 영역이다. 영원을 말하는 입술은 미련할지 모르나, 그 말을 지탱하는 심장은 그 어떤 물리적 법칙보다 단단한 실존의 무게를 갖는다.
우주는 단 한 뼘도 비어 있지 않고, 모든 추상은 집합으로 가득 차 있다. 사랑이 끝난 자리도 공집합이 아니다. 거기엔 함께했던 기억의 변인들과, 성숙해진 자아의 가중치가 빼곡히 들어차 있다.
그러니 영원할 것처럼 사랑하는 것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 '영원'을 쫓는 헛수고가 아니라, 찰나의 순간에 영원의 속성을 부여하여 내 삶의 집합을 가장 아름다운 원소들로 채우려는 창조적 행위이기 때문이다. 미련함이라는 껍데기 속에 감춰진 그 진심이야말로, 우리가 이 빽빽하고 차가운 우주를 견디게 하는 유일한 온기일지 모른다.
#생각번호2026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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