흄이 던진 거대한 물음표
과학은 '검증'을 생명으로 삼는다. 수만 번의 실험을 통해 "A를 했더니 B가 나오더라"는 데이터를 쌓고, 이를 통해 하나의 법칙을 세운다. 우리는 이것을 객관적인 진리라고 믿는다. 하지만 18세기 철학자 데이비드 흄은 이 단단해 보이는 과학의 성벽 아래에 시한폭탄 하나를 설치했다. "수만 번의 검증이 성공했다고 해서, 수만 한 번째에도 성공할 거라는 보장이 어디 있는가?"
과학이 사용하는 가장 강력한 도구는 '귀납법'이다. "어제도 해가 떴고, 오늘도 떴으니, 내일도 뜰 것이다."라는 식이다. 하지만 흄의 관점에서 보면 이것은 논리적 비약이다. 우리가 과거에 관찰한 사실들은 '과거'에만 유효할 뿐,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보장하지 않는다.
검증 가능성을 조건으로 삼는 과학은 역설적으로 '미래의 자연은 과거와 같을 것이다'라는 증명 불가능한 전제를 미리 깔고 있어야만 성립한다. 흄은 이 전제가 논리적으로 증명될 수 없으며, 단지 인간의 '믿음'이나 '관습'에 불과하다고 지적한다. 즉, 과학은 차가운 이성이 아니라 뜨거운 신념 위에 세워진 건축물인 셈이다.
그렇다면 흄은 과학을 가짜라고 부정하려 했을까? 그렇지 않다. 흄 역시 과학적 방법론이 실용적으로 얼마나 유용한지 잘 알고 있었다. 다만 그는 과학이 '절대적 진리'를 선포하는 독단에 빠지는 것을 경계했다.
그의 메시지는 명확하다. 과학적 법칙은 세상을 설명하는 '완벽한 정답'이 아니라, 지금까지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가장 확률 높은 추측'이라는 것이다. 검증을 거듭할수록 그 추측의 신뢰도는 높아지겠지만, 그것이 원인과 결과 사이의 필연적인 고리를 증명해 주지는 못한다. 과학은 '진리'를 찾는 과정이 아니라, '오류를 수정해 나가는 겸손한 관찰'이어야 한다는 뜻이다.
흄의 철학은 과학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과학이 가져야 할 가장 중요한 덕목인 '개방성'을 열어주었다. "A 뒤에 반드시 B가 온다"는 독단에 빠진 과학은 새로운 발견을 가로막는다. 하지만 "지금까지는 A 뒤에 B가 왔지만, 내일은 C가 올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과학은 늘 깨어 있을 수 있다.
우리는 흔히 과학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줄 종교라고 믿고 싶어 한다. 하지만 흄은 우리에게 일깨워준다. 우리가 발을 딛고 있는 이 법칙의 땅이 사실은 '습관'이라는 가느다란 줄에 매달려 있다는 것을. 과학적 검증은 세상을 지배하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미지의 세계를 조금이라도 더 이해해 보려는 인간의 처절하고도 아름다운 '기대'일 뿐이다.
우리가 과학을 신뢰하는 이유는 그것이 완벽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언제든 틀릴 수 있다는 그 불완전함을 인정하면서도, 오늘 최선의 관찰을 멈추지 않기 때문이다.
#생각번호2026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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