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치 않은 사랑에 응답해야 할 이유가 있는가

존재의 기원에 대한 강제성

by 민진성 mola mola

신이 인간을 사랑한다는 고백은 아름답게 들리지만, 한편으로는 지독하게 폭력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나는 태어나고 싶다고 말한 적이 없다. 내가 선택하지 않은 세상에 던져졌고, 내가 원치 않은 결함(악함)과 시련을 떠안았다. 그런데 이제 와서 신이 나를 사랑하니 자신을 믿고 따르라는 것은, 마치 누군가 나를 납치해놓고 "내가 너를 사랑하니 너도 나를 사랑해야 한다"고 강요하는 스톡홀름 증후군과 무엇이 다른가.



존재의 기원에 대한 강제성

우리는 삶의 시작 단계에서 어떠한 계약서도 쓰지 않았다. 부모를 선택할 수 없듯 창조주 역시 선택의 대상이 아니었다. 질문자가 느끼는 이질감의 핵심은 바로 이 '존재의 수동성'에 있다. 신이 나를 사랑해서 세상을 만들었다면, 그 세상에서 겪는 고통과 나의 악한 본성 역시 신의 책임이 아닌가? 이토록 불공평한 출발선에서 신의 사랑에 응답해야 할 의무를 찾는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앞뒤가 맞지 않아 보인다.



'의무'가 아니라 '존재의 방식'에 대하여

여기서 그리스도교는 '의무'라는 단어를 조금 다른 방식으로 해석한다. 그것은 도덕적인 채무를 갚는 일이 아니라, '고장 난 기계가 매뉴얼을 찾아가는 과정'에 가깝다.

우리가 시련을 겪고 본성의 악함에 휘둘리는 상태를 그리스도교는 '정상'이 아닌 '고장'으로 본다. 신이 자신을 믿고 따르라고 하는 것은, 사랑을 강요해 숭배받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렇게 해야만 인간이라는 존재가 설계된 대로의 평안과 가치를 누릴 수 있기 때문이라는 논리다. 즉, 응답은 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고통 속에 던져진 나 자신을 구원하기 위한 유일한 생존 전략으로 제시된다.



일방적인 사랑의 비극과 자유의지

하지만 여전히 의문은 남는다. 왜 애초에 시련과 악함이 존재하는가? 그리스도교는 이를 '자유의지'의 값비싼 대가라고 설명한다. 신이 인간을 로봇처럼 만들었다면 시련도 악함도 없었겠지만, 그것은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는 인격체도 아닐 것이다.

신이 인간에게 준 시련과 악하게 변할 수 있는 가능성은 역설적으로 인간을 가장 존엄한 존재로 대우했다는 증거가 된다. 물론 이 답변은 고통받는 당사자에게는 공허한 철학적 유희처럼 들릴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이 일방적으로 사랑을 쏟는 이유는, 인간이 그 자유를 사용해 다시 자신에게 돌아올 때 비로소 '진짜 관계'가 시작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거부할 자유조차 사랑인가

가장 이상한 지점은, 신이 자신을 거부할 자유조차 인간에게 허락했다는 사실이다. 만약 신이 독재자처럼 굴었다면 우리는 질문조차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가 "왜 내가 응답해야 합니까?"라고 따져 물을 수 있는 이 치열한 회의조차 신이 부여한 인간의 존엄성 안에 있다. 그리스도교가 말하는 응답은 굴종이 아니다. 그것은 "왜 나를 이 세상에 던져놓았느냐"고 멱살을 잡고 따지던 인간이, 그 질문의 끝에서 자신을 끝까지 놓지 않는 신의 시선을 발견하고 '스스로 선택하여' 손을 잡는 과정이다.





#생각번호20260121

본 글은 RE:Mind 아카이브 프로젝트의 일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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