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라는 집합의 종말에 관하여
모든 집합의 부분집합인 공집합은 기묘하다. 원소가 하나도 없지만 존재하며, 모든 것의 시작이자 끝이다. 이 공집합은 인간에게 있어 '죽음'이라는 절대적 허무일 수도 있고, 무엇으로든 변할 수 있는 '가역성' 그 자체일 수도 있다. 그런데 만약, 인간의 오만이 극치에 달해 과학의 힘으로 이 공집합(비어 있음)마저 지워버린다면, 즉 우리 존재의 근원적 결핍과 한계를 완전히 메워버린다면 우리는 어떻게 될까?
실존주의적 관점에서 공집합은 '죽음'이다. 인간이 가진 모든 원소(지위, 기억, 육체)가 소멸했을 때 마주하는 텅 빈 상태다. 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가역성'이기도 하다. 아무것도 채워져 있지 않기에 우리는 무엇이든 될 수 있고, 어디로든 다시 돌아갈 수 있다. 비어 있음은 곧 결핍이지만, 그 결핍이야말로 인간을 움직이게 하고 타인을 갈구하게 만드는 중력의 근원이다.
만약 과학이 발전하여 인간의 죽음을 극복(불멸)하고, 모든 욕망을 즉각적으로 충족시키며, 뇌에 모든 지식을 직접 주입한다고 가정해 보자. 이는 수학적으로 '존재의 집합에서 공집합을 삭제하는 행위'다. 모든 칸이 빈틈없이 원소로 꽉 차버린 상태. 더 이상 비어 있는 구석이 없고, 더 이상 돌아갈 '무(無)'가 없는 존재다.
역설적이게도 공집합이 지워진 집합은 가장 완벽해 보이지만 가장 고립된 존재가 된다. 우리가 타인과 합집합을 이루고 소통하려 했던 이유는 내 안의 공집합(결핍)을 채우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내 안이 완벽한 원소들로 가득 차 공집합이 사라진다면, 나는 더 이상 타인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교집합도, 합집합도 의미가 없어진다. 공집합이 사라진 인간은 더 이상 '가역적'이지 않다. 변할 수 없고, 흔들릴 수 없으며, 끝날 수도 없는 단단한 '결정체'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것은 진화가 아니라, 인간이라는 종의 '존재론적 종말'이다.
우리는 공집합이 있기에 겸손할 수 있다. "나는 언제든 다시 비워질 수 있는 존재"라는 인식이 우리를 인간답게 만든다. 과학이 우리를 아무리 화려한 원소들로 치장해 줄지라도, 그 밑바닥에 흐르는 '텅 빈 공집합'만큼은 건드려서는 안 되는 성역이다.
그 비어 있는 자리가 있기에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하며 삶을 사랑하고, 결핍을 느끼며 타인의 손을 잡는다. 공집합은 인간이 가진 가장 슬픈 속성이지만, 동시에 우리가 서로를 알아볼 수 있게 하는 유일한 '공통의 암호'이기 때문이다.
#생각번호20260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