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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쎄요 Jan 20. 2018

허공 속을 맴도는 진실에 대하여 <세 번째 살인>

 고레에다 히로카즈 2017 작품

세 번째 살인은 사회를 둘러싼 담론이 개인에게 어떻게 도달하는지에 대해 보여주는 영화다. 개인의 생각은 곧 가족의 가르침이었고 그 가르침은 사회에서 원하는 일종의 규범이자 담론이다. 이 무한 루트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








시게모니는 판사 아버지 아래에서 자라 현재 자신은 변호사로서 (딸의 절도죄까지 막아줄 수 있는 파워를 가진) 사회적  지위를 지니고 있는 소위 ‘정상적인’ 범주에서 살아온 사람이다. 여기서 말하는 정상적임의 기준은 사회에서 원하는 인간상으로서 그들을 둘러싼  담론들을 수용하고 사는 것을 뜻한다. 어떻게 보면 이것은 보수적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은 시게모니와 같은 삶을 살고 있다.



시게모니 아버지가 나오는 에피소드를 생각해보자. 비서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성희롱이 될 수 있는 발언을 농담으로 치부한다. 그러한 아버지 아래에서 자란 시게모니를 포함한 변호사들 사이에서 비서는 당연히 커피를 타야 하는 존재이다. 그것은 그들이 의식해서라기보다 그저 그들이 지내고 있는 사회에선 그렇게 하는 것이 익숙하고 당연해진, 즉 정상적인 행동이다. 이 단락은 맨 앞에서 밝힌 사회가 (가족을 통해) 개인에게 끼치고 있는 영향의 대한 연결고리로 이해할 수 있겠다.
이러한 추론은 자연스럽게 이 영화의 핵심 질문인 “이 세상의 태어나지 말아야 할 사람이 있어”라고 생각하는 시게모니의 말로 이어진다. 시게모니 개인의 가치관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곧 판사인 아버지의 가치관이었음을 우린 영화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이것은 사회적 발언이 되어 범죄자 미스미에게도 영향을 끼친다. 실제로 그는 자신이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인간이라고 생각한다.









미스미는 부인할 수 없는 범죄자이다. 하지만 그의 말이 번복될 때마다 관객들은 혼란스럽다. 실제로 우리는 시게모니 입장에 서서 그가 좋은 사람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특히나 이러한 생각은 겹쳐질게 없는 시게모니와 미스미 사이에서 보이는 비슷한 점 때문이다. 정확히는 시게모니의 딸과 미쿠마의 공통점 때문이다.
유복한 환경에서 태어났음에도 부모의 관심이 부족했던 것인지 혹은 다른 이유로 시게모니의 딸은 삐뚤어진 것 같다. 그녀의 첫 등장은 절도를 저지르고 난 뒤다. 시게모니와 딸의 식사 자리는 꽤나 어색해 보이는 가운데 딸이 키우던 물고기 니모는 어떠냐고 물어본다. 딸은 죽었다고 대답하는데 이때 시게모니는 변기에 버린 건 아니지? 하면서 동물이 죽으면 묻어줘야 한다고 대답한다. 이 부분은 곧 새를 키우던 미스미가 새를 어떻게 죽였고 어떤 방식으로 묻어줬는지에 대해 알게 되면서 이어진다. 이때부터 우리가 생각한 명확한 악과 선은 불분명해진다. 정확히는 악은 처음부터 악이라고 생각했던 시게모니와 관객들에게 질문이 던져진다. 과연 너는 선이라고 말할 수 있는 존재인가.
미스미는 뒤늦게 한 마리의 새는 풀어주었다고 고백한다. 여기서 죽을 수도 있는 새는 곧 아버지에게 성폭행 당하고 있던 사키에를 의미할 수도 있다. 이러한 고백은 미스미에게 악한 면과 선한 면이 모두 공존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마지막 미스미와 시게모니의 면회씬에서 유리창을 통해 겹쳐지는 그들의 얼굴을 통해 감독은 다시 한번 명확한 선과 악의 구분을 없앤다.
하지만 사회에선 선과 악은 분명하게 구별지어져야 한다. 그래야 사회는 안정적으로 돌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악한 존재는 원래부터 악하다는 전제를 통해 사회의 문제가 아닌 개인의 문제로 환원된다. 그렇게 우린 이분법적인 법체계 속에서 악한 존재들을 처단하며 안전함을 느낀다.









영화 후반부 갑작스러운 미스미의 무죄 주장으로 판사, 변호사, 검사가 모여 회의를 하는데 그들은 미스미 주장보다 경제적인 재판을 위해 플랜을 짠다. 즉 이 사회 속에서 진실은 무의미하다.



우리는 계속해서 진실이 무엇인지에 대해 궁금해하며 영화를 본다. 하지만 그것은 곧 무의미한 일임을 알게 된다.
사키에가 지붕에서 떨어져 다리를 전다는 것과 미스미가 사키에를 구하기 위해 공장주를 죽인 건 진실이다. 시게모니의 딸과 미스미의 눈물은 거짓이다. 하지만 그것이 진실이고 거짓인 게 중요한 걸까? 중요하다. 하지만 적어도 법적인 테두리 안에서, 우리 사회 속에서 중요하지 않다. 그저 정해진 사회 속 담론 혹은 시스템에 의해 진실은 필요에 의해 선택되고 심판받을 뿐이다.




나는 이 영화가 사회를 둘러싼 담론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순응하고 있는지, 또 그것을 깨달았을 때의 혼란함의 대한 이야기라고 본다. 그 혼란함은 여전히 진행형이며 우리가 풀어가야 할 숙제라는 걸 마지막 엉켜진 전깃줄을 통해 알려준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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