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장님 잠시 휴가를 내고 중국에 다녀와야겠습니다

첫 만남

by 권즈

며칠 전 한 통의 긴급한 전화를 받고 나는 배낭을 챙겨 바로 인천발 베이징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이제는 베이징의 공항에서도 동북으로 향하는 기차표를 쉽게 구매할 수가 있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기차표는 역에 가서 줄을 서거나 여행사를 통해 구할 수 있었지만 이제는 인터넷을 통해 쉽게 표를 구입할 수 있게 되었다. 이 나라도 더 이상 개혁 개방과 인터넷이라는 커다란 흐름을 따라가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나는 베이징 3번 공항에서 기차역으로 향하는 직행버스를 올라타고 곧바로 창춘으로 가는 K215번 기차에 올랐다. 우리나라의 완행열차에 해당하는 K기차는 밤 9시 정각에 수많은 짐들을 울러 멘 시골 사람들과 깨끗한 양복을 차려입은 샐러리맨들이 뒤섞인 육중한 철체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10시가 지나자 기차의 모든 불이 꺼지고 컴컴한 밤을 가르는 기차 바퀴소리만이 들려왔다. 나는 일산에 사는 선일이가 전화로 제발 도와달라는 그 애절한 목소리가 떠올라 도저히 잠들 수가 없었다. 나는 달빛에 환히 빛나는 눈 덮인 세상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지금은 정적뿐.

기차에서 내다본 12월의 만주 벌판은 이미 혹독한 추위 그 자체였다. 세상의 모든 것들을 흰 눈이 삼켜 버린 듯 매섭고 차가운 바람이 불고 있다. 마치 나에게 그 어떤 것도 살아있어서는 안 된다 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어디에서부터 이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그리고 내가 왜 지금 이렇게 급하게 이름과 주소만이 적힌 종이 한 장만 달랑 들고서 얼굴도 모르는 사람을 찾으러 고요히 잠든 만주 벌판을 달리고 있는지도 잘 모르겠다. 그저 내 머릿속에는 그 아이를 살려야 한다는 생각 밖에는 들지 않는다.


어느새 나는 옛 기억을 더듬어 피터 선생님과의 첫 만남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2010년 겨울 쿤밍으로 향하는 기차 안.

당시 대학생이었던 나는 여행 중이었다. 학과에서 받은 성적 우수 장학금 이백만 원을 고스란히 털어 친구와 함께 중국의 이곳저곳을 한창이나 여행하고 있었다. 우리는 추운 겨울을 피해 남쪽으로 이동하는 루트를 짰고 이미 준비한 여행 책자의 안내에 따라 사계절 동안 꽃이 피는 아름다운 도시인 쿤밍으로 가기고했다. 칭다오에서 출발한 기차는 이미 며칠 동안 달리고 있었다. 신기하게도 창 밖의 풍경은 겨울에서 조금씩 봄으로 바뀌고 있었다. 바람도 한결 따스해졌다.


우리는 기차에 탄 중국 사람들을 사귀며 신나게 떠들며 여행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나는 기차의 가장 끝자리에서 나를 힐끔힐끔 쳐다보는 한 사람의 눈길을 의식하기 시작했다. 내가 가끔 그를 쳐다보면 그는 눈길을 피하고 창밖을 묵묵히 응시하곤 했다.


그는 이미 중년을 훨씬 지난 흰머리가 희끗희끗한 40~50대로 보였다. 그러나 그의 눈매는 매서웠고 몸은 자그마한 했지만 힘이 센 듯 탄탄한 몸매를 가진 어수룩한 도시민 같아 보였다. 나는 그 역시도 한국 사람에게 관심을 보이는 한 사람이겠거니라고 생각하다가 그가 한국어로 된 책을 읽고 있기에 그것이 나의 단순한 착각이라는 사실을 곧 알게 되었다. 나는 그에게 다가가 한국어로 물었다.


“혹시... 한국 분이신가요?”

“그렇소. 한국인이오. 젊은이는 보아하니 지금 여행 중인가 보군.”


그는 나를 바라보고 내가 한국의 젊은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흡족하다는 듯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에 나는 중국에는 잘 없는 웃어른들을 향한 한국인의 예절을 다시 생각해 낸 듯 곧 그에게 존대를 하고 대화를 시작하게 되었다. 그분이 바로 피터 선생님이셨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나는 그도 쿤밍 쪽으로 간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는 이 한 겨울에 한국인뿐만 아니라 외국인 자체도 드문 이 기차에서 중년의 남자가 혼자 기차를 타고 쿤밍으로 향하는 이유가 궁금해졌다. 사업을 할 것이었으면 베이징이나 티엔진, 상하이가 제격일 것이고 여행을 할 것이었으면 쿤밍까지 비행기를 타지 않고 굳이 기차를 탈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저... 근데 쿤밍에는 무슨 일 때문에 가시나요?”

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러자 그는 내게 몸을 조금 숙이더니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조용한 목소리로 내게 웃으며 말했다.

“아이들을 구하러 간다네.”

“네? 아이들이요?”


나는 순간 판단이 잘 서지 않았다. 도대체 이 사람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인가. 돈벌이도 여행도 아닌 갑자기 아이들이라니... 그는 나를 바라보며 지긋이 미소만 짓고 있을 뿐 내가 다시 질문하기 전에는 그 어떤 말도 해주지 않을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기에 나는 다시 물었다.


“선생님 대체 무슨 아이들을 말씀하시는 건지...”

그러자 그는 나의 눈을 빤히 쳐다보더니 잠시 깊은 생각과 고민에 빠진 듯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것은 내가 아무리 타국에서 만난 고국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 짧은 시간에 나를 파악하고 내가 신뢰할 만한 사람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려는 듯한 그의 노련함이 묻어난 육감 같은 것이 아니었나 싶다. 다행히 나는 그의 마음에 들었던 모양인지 그는 나에게 자신이 지나온 비밀스러운 여정을 조심스레 말해주었다.


그의 이름은 ‘박**’으로 실명은 있지만 ‘Peter Park'이라는 코드명을 사용하여 활동하는 W**(NK) 단체 소속의 선교사였다. 이 단체는 주로 야음을 틈타 북한의 압록강과 두만강을 넘어 중국으로 월북한 북한 아이들을-그중 대다수는 북한 접경지역의 작은 소도시에서 꽃제비로 활동하거나 매매춘을 하며 살아간다고 했다-한국으로 안전하게 건너올 수 있도록 돕는 일을 한다고 했다.


주로 세 팀으로 나누어 일을 진행하는데 첫 번째 팀은 단동, 집안, 투먼, 엔지 등지에서 한국으로 갈 의사가 있는 탈북 아이들을 찾아 동북지역의 교통의 중심지인 션양까지 데려가는 일을 한다. 한 번에 많은 아이들을 데리고 다니면 공안들의 의심과 주목을 끌 수 있기에-중국은 한 가정 한 자녀 정책을 시행했다. 일부 부유층과 소수민족을 대상으로는 둘째 셋째 아이까지 허용하나 그 숫자가 그리 많지는 않다-한 사람당 최대 두 명의 아이들만 데리고 기차를 제외한 버스나 택시, 혹은 상황에 따라 도보까지 이용해 선양으로 이동한다. 기차표는 신분증이 있어야 발급이 됨으로 탈북자들이 사용하기에는 위험 부담이 크다고 했다.


두 번째 팀은 선양에서부터 국경지대까지의 이동을 담당한다. 예전에는 주로 내몽고를 거쳐 몽골 국경까지 가는 루트를 사용했지만 사막과 악천우 때문에 위험부담이 커 지금은 윈난성의 찡홍 지역을 따라 흐르는 메콩강 지류를 통해 미얀마, 라오스, 태국으로 빠져나가는 루트를 사용한다고 했다.


마지막 팀은 윈난성에 미리 도착해 국경을 넘나들며 대사관에서 발급한 망명 신청서를 작성한 후 아이들을 데리고 대사관을 거쳐 한국으로 이동시키는 일을 한다. 피터 선생님은 자신이 세 번째 팀의 팀장이라고 했다. 그래서 자신은 한국에서 중국으로 들어올 때 공안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 먼저 상해로 입국한 후 여행객으로 가장한 채로 윈난성으로 돌아가는 길이라고 했다. 이번에는 네 명의 아이들이라고 했다. 네 명의 아이들의 생명과 삶이 이 한 사람의 손에 달려 있다는 생각이 천천히 대화 가운데 내게로 밀려들자 나는 여행의 들뜬 기분이 가라앉고 뭔가 착잡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나는 젊은 날의 나 자신에게 스스로 이런 질문을 던져 보게 되었다.


‘나는 지금 어디에서 무얼 하며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인가?’라고.

나는 여행을 통해 그 답을 계속 찾고 있었지만 그러지 못했었다. 따라서 나는 피터 선생님이 조용히 내뱉는 말들을 가만히 듣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내가 느끼기에 그는 적어도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어디로 가는지를 확실히 알고 있는 듯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러기에 나는 그가 당시에는 무척이나 부러워 보였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다음 날 기차는 쿤밍에 도착했고 우리는 서로의 이메일 주소만 주고받은 후 헤어졌다.


그 후 나는 여행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와 다시 예전과 다름없이 대학교 생활과 일상적인 일로 바쁘게 지내게 되었다. 마치 피터 선생님과의 만남은 여행 중에 잠시 만났던 추억의 일부분으로 여겼던 것처럼 말이다. 내게도 나만의 삶이라는 것이 있지는 않은가 라는 내면의 핑계를 항상 대어가면서 말이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 군 제대 후 대학을 졸업한 어느 날이었다. 취업을 위해 인터넷을 뒤지며 이메일을 확인하고 있을 때였다.

나는 <자네 나를 좀 도와주어야겠네>라는 제목의 이메일을 발견했다. 그것은 6년 만에 날아온 피터 선생님의 편지였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