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는 나보다 세 살이나 적다.
그러나 이미 결혼을 하고 한 가정의 가장이며 군에서는 한 연대 안에서 참모직의 직급을 수행하고 있다. 예전에 함께 유학을 하던 시절에는 서로를 잘 챙겨주고 우의 깊게 지냈던 동생으로만 여기고 살아왔었지만 K는 어느새 세월이 흘러 나보다도 훨씬 의젓하고 사려 깊은 사람이 되어 있었다. 결코 인생은 나이라는 숫자만으로는 그 크기와 넓이와 경중을 가늠할 수 없는 것이다.
전철에서 내린 나는 약속한 장소로 갔다. 이미 해는 져서 하늘은 어두워졌지만 복잡한 도시의 네온사인과 수많은 가로등이 어둠을 이기려는 듯 거리를 밝히고 있었다. 내가 약속 장소로 가서 얼마를 기다리자 K는 멀리서 나를 향해 환한 웃음을 머금고 달려왔다. 그리곤 나를 보자마자 나를 꽉 끌어안으며 그동안 보고 싶었었다고 말하더니 한동안 내 손을 꼭 잡아 주었다. 그것이 오랜만에 만난 우리들의 반가움의 표현이었다. 손이 따뜻했다. 그리고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며 행복하게 웃고 있었다. 나는 이 따뜻함이 참 행복하게만 느껴졌다.
두 사람이 꾸며놓은 신혼집은 밝고 깨끗하고 아담하고 포근했다. 나처럼 벌써 여행의 먼지와 체취를 간직한 사람에게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집 같았다.
K의 아내는 나를 진심으로 반갑게 맞아주었다. 먼저 나의 얼마 되지 않는 짐을 풀고 깨끗하게 씻은 후 거실에 모여 앉아 정성스럽게 손질한 과일을 나누어 먹으며 그간 살아왔던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사실 나는 K의 아내, 즉 제수씨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결혼 전에 잠깐 강남에서 인사를 나누었을 뿐 그 전에도 그 이후에도 특별한 만남이 없었기에 당연한 일이었지만 왠지 모르게 둘이 하나가 된 집으로 찾아가자 싱글인 내가 괜한 짐이나 부담이 되지나 않을까 하여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나는 그녀가 어떤 일을 하는지 물어보았다. 그녀는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국어를 가르친다고 했다. 그렇게 대화의 끈이 하나둘씩 풀리기 시작했고 첫 만남의 어색함이 깨지기 시작했다. 곧 우리는 서로의 대화 속으로 빠져들었고 나는 줄곧 그녀가 하는 이야기를 경청했다. 그것은 곧 여행자가 가질 수 있는 유일한 특권, 상대방을 판단하거나 가려보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고 현재의 순간을 기쁘게 즐기는 모습이었다. 여행자는 바람처럼 스쳐 지나가는 인생들의 이야기를 몸으로 듣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나의 세계에 또 다른 한 사람의 세계가 조우하는 것을 너무나 즐거워하는 여행자임이 확실하다.
그녀는 서울의 유명 대학 교육학과를 졸업한 후, 서울에 위치한 어느 작은 대안학교에서 일하고 있었다. 대안학교란 일반적인 중고등학교 교육 과정이 아닌 대안학교 각자만의 고유한 커리큘럼을 가지고 자유롭게 학생들을 가르치는 조금 특성화된 교육기관이다.
대화가 지속될수록 나는 그녀에게 진심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고 그녀 역시 내게 자신의 진심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문득 자신의 일에 대해 차분하면서도 깊이 있게 말하고 있는 그녀가 행복해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단 그녀가 결혼을 했고, 또 얼마 전에 아이를 가졌기 때문만이 아니라 자신의 삶에 대한 가치를 지닌 것 같아 보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그녀에게 이렇게 물어보았다.
"저는 이번 여행을 떠나면서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행복과 가치 있는 삶이 무엇인지를 한 번 찾아보려고 하는데 어떤 생각이 있는지 한 번 물어보고 싶은데 물어봐도 괜찮겠죠?"
그러자 그녀는 나의 말에 담긴 깊은 진심과 호의에 기꺼이 물론이라고 대답해 주었다. 밤이 점점 깊어져 갔고 나는 여행 중이었기에 그 누구와 그 어떤 이야기도 할 수 있는 자유로움이 있었다. 그 자유로움이 그녀에게도 전달되었던지 잠시 곰곰이 생각하더니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그녀가 처음으로 인생의 가치를 발견하고 진로를 결정할 수 있었던 최초의 경험은 더 어렸던 시절 교회학교의 학생 교사를 맡아서 할 때였다. 처음에 맡았던 아이들은 어린 학생들이었다. 처음 일 년 동안에는 말썽만 부리고 잘 따라오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조금 더 어린아이들을 가르쳐보려고 고민했었지만 그러지 않기로 결국 결정했다. 그녀가 더욱 열심히 아이들을 더 가르치는 동안 그 아이들이 조금씩 변화되기 시작했고 결국 다시 일 년 만에 자신을 따라오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 변화는 그 아이들 스스로가 느꼈을 뿐만 아니라 그 부모님들도 느낄 수 있는 그런 변화였다. 그때에 그녀는 생애 처음으로 자신의 삶으로 인해 변화를 경험한 아이들을 바라보면서 자신이 진정으로 살아있다는 느낌을 받았단다. 자신이 자신답게 살아있는 진정한 느낌, 그녀는 그것이 가치로운 인생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러한 일, 특별히 학생들을 대하는 일이 자신의 적성에 가장 적합한 일이라는 것을 자연스럽게 깨닫게 되었다고 했다. 그래서 그녀는 전공도 교육학을 선택했다. 졸업을 하고 진로를 결정할 시기에도 그녀는 이 가치를 소중히 생각했기 때문에 보수가 그렇게 많지 않은 대안학교 교사를 시작하게 된 것이었다. 그녀에게 있어서 행복의 기준은 가치로운 삶의 실현에 있었고, 그 가치란 타인의 변화를 함께 경험하고 바라보는 데 있으며 더 나아가 그 변화를 돕는 데에 있다고 했다.
이것이 그녀의 답이었다.
여기까지 이야기를 마치고 나니 두 사람의 대화를 묵묵히 듣고 있던 후배인 K도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줄곧 가까이 지내오기는 했지만 깊이 알지 못했던 생각들을 나는 처음 들을 수 있었다. 만약 내가 여행을 떠나지 않았다면 아마 평생 들을 수 없는 이야기였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여행자였고, 그는 나를 기쁘게 맞아 준 편안한 친구였다. 친구란 무릇 어떤 이야기도 두서없이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함이다. 나이와 직위와 경험을 떠나 서로를 인정하고 이해하고 수용할 줄만 안다면 노인이 아이와, 선배가 후배와, 동지가 적과 충분히 친구가 될 수 있는 법이다.
K의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가치는 나누는 것이었다. 자신이 가진 돈, 시간, 재능, 지식, 따뜻한 마음 등등을 가능한 조금씩 나누는 일이 자신을 행복하게 만든다고 했다. 나이가 들고 자신이 맡아야 할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지만 그만큼 자신이 가지게 된 것들도 많아지고 있기에 이것을 앞으로 어떻게 더 지혜롭게 나누어 주어야 할지를 고민해보고 있다는 말도 했다. 나누는 것이 일반적인 경제학 개념 속에서 마이너스가 되는 의미가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삶의 가치를 더욱 더한다는 것이다. 결국 사람은 자신이 가진 무언가를 타인에게 조금이라도 나눌 때 가치를 느끼고 거기에서 행복을 느낀다는 것이었다.
그는 곧이어 예전에 중국을 여행하면서 만났던 낯선 사람들이 자신에게 나누어 준 그 친절함의 추억, 자신이 지금 부대에서 나눌 수 있는 영역에 대해, 앞으로 살아갈 삶이 그러한 나누는 삶이 되고 싶다는 바람에 대해 자연스럽게 이야기했다. 나는 그의 이야기를 끝까지 경청했다. 그리고 그의 말을 이렇게 정리하기로 했다.
나는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며 생각했다. 내가 이 여행을 통해 앞으로 배우게 될 더 많은 깨달음과 경험들이 쌓이고 나면 진정한 의미의 행복한 삶과 가치에 대한 정의를 조금이나마 더 정확하게 내릴 수 있고, 또 그렇게 살아갈 수 있을 것 같다는 용기가 생겼다. 그래서 길은 무작정 밟고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씩 차근차근 물으면서 가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나는 걸어간다. 그리고 그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고 삶을 이야기하고 그 속에서 진정한 여행의 의미를 써내려 갈 수 있을 것이다.
다음날 새벽 5시 반에 일어나 세면을 하고 간단한 아침 식사를 마친 후 다시 길을 나섰다. 내가 돈이 없다는 사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해 이번 여행을 위해 지금껏 내가 모아둔 돈을 소유하지 않으려 함을 잘 알고 있었던 부부는 내게 과일을 비롯해 길 위에서 먹을 수 있는 김밥과 음식들, 그리고 많지는 않지만 하얀 봉투에 넣어둔 빳빳한 쌈짓돈도 함께 손에 쥐어 주었다.
나는 그 배려에 감사하며 눈을 비비면서 전철역을 나섰다. 1호선을 타고 구로에서 내려 다시 천안으로 향하는 1호선 완행 전차에 몸을 실었다. 아침 햇살이 멀리 동쪽에서 멋있게 떠오르는 것을 바라보며 나는 이것 역시 여행이 주는 행복 중에 하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평소에는 침대에서 뒤척거리다가 출근하느라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던 도심의 일출이었기에 더욱 색다르게 다가왔다. 이것은 새로운 발견이었다. 여행길에서 만난 모든 것은 설렘이 되고 그 설렘을 마주하는 순간 나는 매번 새로움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그 발견에 대한 기대감이 점점 커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