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권즈 Oct 23. 2021

캉딩, 세번째 이야기, 티베트의 활불을 직접 만나다.

쓰촨 성 캉딩 난우스 법회

 



 자각

 비우고 비우고 또 비워도,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이 인간의 욕망이리라.


 이 욕망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

 인간은 그렇게도 비우는 연습을 하는가 보다.


 진정 모든 것을 비울 수 있는 사람이

 진정 모든 것을 채울 수 있는 법이다.


 나는 무엇을 비우고 있으며, 

 무엇을 채우고 있는 중인지 조용히 돌아보아야 하리.


 비워야 할 것은 육체의 욕망이며,

 채워야 할 것은 하나의 진리 이리라.

 비움과 채움의 가깝고도 먼 간극(間隙)에 내가 존재하는구나.



 다음날 아침, 숙소의 거실은 이른 시간부터 많은 사람들의 대화 소리 때문에 부산스러웠다. 어젯밤 깊은 생각과 알 수 없는 불안감에 잠겨 깊이 잠들지 못했던 나는 그 소란스러운 소리에 그만 잠에서 깨고 말았다. 나는 부스스한 머리를 만지며 온 몸을 파고드는 추위도 잊은 채 얼른 거실로 나가 보았다. 그곳에는 어른 상체만 한 등산 가방 세네 개가 한 곳에 쌓여 있었고, 막 캉딩에 도착한 듯 보이는 몇 명의 여행객들이 숙소 등록을 하고 있었다. 어제 나의 티베트 여행에 입장권이 되어준 따거와 아쉬(광동성 출신의 입술 두껍고 피부가 까무잡잡한 재미있는 친구) 두 사람이 그들과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는 것을 보고 나는 그들이 도보 여행의 새로운 팀원을 모집하는 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 무리 중에 어제 만났던 푸른 등산복에 검은 안경을 쓴 씨아오찌엔(따거의 의동생, 키가 크고 성격이 호방하며 야한 농담도 서슴지 않는 행동파)이 새로운 여행객들에게 숙소 등록을 도와주고 있었고, 짐과 외투를 거실의 빈 공간에 옮겨주는 등 여러 가지 일들을 돌봐주고 있었다. 씨아오찌엔은 숙소 등록을 도와주는 내내 담배를 입에 달고 있었는데, 누가 보아도 그는 골초였다. 그는 신나게 자신의 여행 팀에 대해 이야기하는 모양이었지만 새로운 여행객들은 그의 친절이나 제안에 크게 관심이 없어 보이는 듯했다.


 그렇게 내가 숙소의 거실에 모인 사람들을 잠시 관찰하는 동안 체크인이 다 되었는지 새로운 여행객들은 각자의 방으로 들어가 버리고 말았고, 따거와 아쉬, 그리고 씨아오찌엔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는 거실의 난롯불에 모여 다시 수다를 떨었다. 

 

 "어제 말한 여행은 오늘부터 출발인가 보죠?" 

 잠이 덜 깬 상태에서 나는 따거에게 다가가며 넌지시 물었다. 


 "이봐, 한국 친구. 우린 겨우 어제 일주일 동안 걸어 루딩에서 이곳 캉딩까지 도착했다구. 캉딩에서는 하루 더 머물다면서 체력을 보충하고 내일이나 다시 출발할 생각이야. 너무 서두르지 않아도 된다고. 길은 멀수록 여유로운 마음을 가지고 천천히 가야 하는 법이거든."  중절모가 내게 무슨 도보 여행의 기술을 전수하듯 자신감에 가득 찬 말투로 말했다. 


 "그럼 오늘은 뭘 하실 거죠?" 나도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되물었다. 

 "우리는 곧 난우쓰의 활불을 보러 갈 예정이야." 

 "활불活佛이요?" 나는 놀라서 되물었다.


 "자네 활불이라는 말 들어봤나? 이곳 티베트에서는 아직도 살아있는 부처가 존재하고 있지. 신당에 동상처럼 앉아있는 멍청하고 힘없는 불상 말고, 진짜 살아있는 부처 말이야. 오늘 그 활불이 때마침 이곳 캉딩에 있는 사찰에서 법회를 연다는군. 이건 아주 자주 없는 천운이라구. 따지고 보면 티베트를 여행 온 많은 사람들 중에 활불을 직접 볼 수 있는 기회를 잡은 사람은 하늘의 별 따기라고 할 수 있지. 어때 구미가 조금 당기나?"


 그들, 즉 티베트인들은 티베트 지역의 살아있는 부처, 신이자 부처인 인간, 그의 말이 곧 불법(佛法)이며, 모든 법문과 축복의 근원이 그의 말과 삶과 행동에서부터 나오는 절대 죽지 않는 환생을 통해 영원히 존재하는 인간, 그들은 그러한 존재를 '활불'이라 불렀다.


 살아있는 부처라... 나는 예전에 방영한 티베트 관련 다큐멘터리에서 활불에 대한 이야기를 본 적이 있다. 활불은 달라이 라마는 아니지만 그와 비슷하게 티베트에 몇 없는 승려로 그도 태어나면서부터 활불로 정해져 평생 동안 티베트 전역을 돌며 법회를 열고 사람들로부터 극진한 대접과 존경을 받는다고 했다. 그의 모든 삶과 행보는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수많은 사람들의 존경과 관심으로 인해 모두 정해져 있으며, 그가 내린 축복을 받기 위해 수많은 티베트인들은 그의 행보를 앞두고 그를 만나기 위해 각지에서 몰려든다고 했다. 바로 그 활불이 마침 캉딩에 있는 작은 사찰에 도착했던 것이다. 나는 여태껏 티베트 불교 법회에 단 한 번도 참석해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인지 꼭 한번 법회에 참석해 직접 내 눈으로 그 법회를 보고 싶어졌다. 물론 모든 말을 티베트어로 진행하겠지만 그것은 나에게 그렇게 중요한 일은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티베트 불교 법회가 내게 전해주는 감화와 메시지였다. 


 "저기, 그럼 그 법회는 몇 시에 시작합니까?" 

 "아침을 먹고 한 오전 10시 정도쯤인데, 왜? 같이 가려고?”

 그가 너스레를 떨며 물었다. 나는 그렇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몇 시에 그곳으로 출발하느냐고 재차 시간을 확인해 본 후 그 시간에 맞추어 같이 가자고 말했다.  


 나는 얼른 방으로 돌아가 간단히 세면을 한 후, 숙소 앞으로 나가 흰 죽과 만두 몇 개로 겨우 끼니를 때우고 약속 시간에 맞추어 다시 거실로 나갔다. 법회에 갈 사람들은 이미 거실에 모여서 내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법회 시간이 다 되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곧장 택시를 타고 법회가 열리는 '난우쓰南无寺'로 향했다. 사찰은 우리가 묵고 있던 숙소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에 택시를 타고서도 금방 도착할 수 있었다. 


 항상 안개와 구름으로 가득했던 청두의 하늘처럼 캉딩의 하늘도 구름이 가득 낀 우중충한 날씨였다. 거기에다가 아침부터 피어오른 겨울 새벽안개가 눈이 싸인 높은 산꼭대기에서부터 점차 마을로 내려왔던지 사찰 전체에 음산한 기운이 감돌았다.  



 활불을 만나러 가는 길


 캉딩의 시가지에서 차로 10분 정도 떨어진 멀지 않은 작은 산 아래에 위치한 난우쓰라는 사찰은 겉으로 봤을 때와는 달리 그 내부의 규모가 작은 산간 마을에 비해 그리 작은 편이 아니었다. 난우쓰라고 적힌 현판 아래 문으로 들어가 보니 정방형의 삼 층짜리 큰 사찰의 내부 건물이 나타났다. 건물의 지붕은 모두 기와로 덮여 있었고, 건물 외부의 전반적인 모습은 처마 끝이 오뚝하게 솟은 한국의 전통 기와집과 같은 형태였다.


 정문 바로 맞은편에는 마을 사람들이 벗어 놓은 신발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고, 그 뒤로 법당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보였다. 그것으로 보아 정문 맞은편에 위치가 커다란 건물이 활불의 법회가 열리는 대법당인 것이 확실했다. 그리고 건물 외벽에 그려진 갖가지 화려한 무늬와 짙은 채색,  건물 지붕에 걸려 있는 차가운 고원의 바람에 나부끼는 타르초와 룽다, 무엇보다도 모든 지붕을 덮고 있는 황금빛이 음산한 산간 마을 속에 우뚝 솟은 웅장한 사찰을 더욱 눈부신 조화를 이루게 만들었다. 나는 눈을 돌려 난우쓰를 등에 업은 설산의 꼭대기를 바라보았다. 설산의 꼭대기에는 언제부터 싸여 있었는지 가늠할 수조차 없는 만년설이 하얗게 쌓여 있었고, 산 전체가 작은 백탑과 타르초와 룽다로 뒤엉켜져 있었다. 나에게는 마치 산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사원처럼 느껴졌다.  


 사원의 중심부에 들어서니 양쪽과 입구 쪽은 모두 동일한 구조의 방들이 이어져 있었다. 그리고 간간히 검게 그을린 피부의 젊은 라마 승려들이 붉은 승복을 입은 채 채색이 짙은 작은 방에서부터 문 밖으로 나오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들은 우리를 보자 환히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때 마침, 주변을 신기한 듯이 관찰하고 있는 나를 향해 따거가 어떤 설명을 하려는 듯 입을 열었다. 

 "본래 티베트라는 땅에는 딱 네 가지 색만이 존재한다고 하지. 사원의 지붕을 덮은 황금색,” 그는 손가락으로 사원의 높은 지붕을 가리키며 말을 이어갔다. “건물 외벽에 칠해진 흰색, 처마와 기와에 덮인 자주색, 그리고 사시사철 마르지도 않고 변하지도 않는 바다와 같은 하늘의 푸른색이 바로 티베트에 존재하는 네 가지 색깔이지."


 나는 그의 말을 듣고서 다시 한번 난우쓰 사원 곳곳을 면밀히 살펴보았다. 그렇게 사찰의 중심부에 들어선 나는 따거의 말을 실감할 수 있었다. 티베트 사찰에는 정말로 그가 설명한 딱 네 가지 색깔만이 존재했다. 

 티베트의 사찰에 처음 방문한 사람들은 다들 기념사진을 찍느라 정신이 없었고, 나는 난우쓰가 전해주는 위압감과 신비한 기운에 눌려 사진을 찍을 겨를이 없었다.

 “자,자! 다들 기념사진일랑 법회가 다 끝나고 찍어도 늦지 않으니 일단 안으로 들어가자고. 활불은 우리가 올 때까지 기다려주지 않는다고. 분위기를 보니 이미 법회가 시작된 거 같은데, 어서 이리로 들어오라고.”

 그제야 사람들은 따거의 손짓과 안내에 따라 신발을 벗고 엄숙한 경내 안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나 역시도 약간의 으스스한 기분과 설레는 마음으로 그들을 따라 어두컴컴한 난우쓰 경내로 들어갔다.




 

 신이자 인간인 활불

 

 우리가 경내에 들어섰을 때는 의외로 조용했고 아무도 없는 듯 보였다. 그러나 어둠 속을 자세히 살펴보니 이미 수 백 명의 티베트 사람들이 숨소리도 내지 않고 빼곡히 자리를 잡고 앉아 어떤 묵념을 하고 있었다. 아마도 법회가 방금 전에 시작된 듯 보였다. 따거는 뒤따라 들어오는 우리를 향해 자신의 검지 손가락을 자신의 입술 위에 조용히 갖다 대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이미 여기에 앉을자리를 알아봐 두었으니깐 다들 나를 따라오라고. 그리고 자리에 앉은 후에는 일체 어떤 소리도 내면 안 돼. 그리고 쓰고 있는 모자는 다 벗고 들어가야 해. 자 이제 다들 조용히 따라오라고."

 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먼저 대법당 안의 구석진 자리로 걸어 들어갔다. 대법당 안으로 통하는 문은 일정한 티베트 문양이 수 놓인 두꺼운 천으로 되어 있었는데, 그 천을 열어젖히고 어두컴컴한 법당 안으로 들어가니 코를 찌르는 야크 버터 냄새와 야릇한 향초 냄새가 단숨에 나의 코 속으로 밀려 들어왔다. 


 '이게 바로 그 말로만 듣던 야크 버터 냄새구나. 생각보다 굉장히 누린내가 많이 나는구나.’

 나는 말로만 듣던 활불을 내 눈으로 직접 보게 되리라는 생각에 따거를 따라 조용히 자리를 잡고 앉았다. 차가운 나무 바닥의 냉기가 내 엉덩이를 통해 곧바로 전신으로 전해져 왔다. 실내인데도 불구하고 굉장한 냉기가 온 경내에 감돌았다.


 ‘왜 이렇게 추운 거지? 밖보다 안이 더 춥군 그래. 이럴 줄 알았으면 더 두꺼운 옷을 입고 오는 건데.' 이런 생각을 하며 나는 양반 다리를 하며 최대한 편안한 자세를 취하고 자리에 앉으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나는 이미 법회가 막 시작한 법당의 한 중간으로 들어왔기 때문에 더 이상 그 추위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깨닫고, 그 추위를 무던히 받아들이기로 했다.


 앞서 말했듯이 법당 안에는 이미 수 백 명의 티베트 사람들이 법당의 중앙에서부터 입구까지 발 디딜 틈도 없을 정도로 밀집해 있었다. 어두컴컴한 내부는 이층에 난 창문으로부터 빛 한 줄기가 내비쳤고, 그 빛줄기가 곧바로 대웅전에 안치된 황금으로 만들어진 대불 상의 상체를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아마도 외부에서부터 들어오는 자연채광이 한낮 동안에는 대불상을 그대로 비출 수 있도록 사찰이 설계된 것 같아 보였다. 그 대불상의 얼굴은 세상의 모든 삶을 초탈한 듯 한 온화하고도 야릇한 미소를 띠고 있었지만 나는 왠지 모를 음침함을 느꼈다. 왜냐하면 나는 예전부터 불교의 모든 신은 귀신의 또 다른 형태라는 소리를 어디선가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인생을 살면서 이러한 정통 티베트 법회를 눈과 귀로 직접 보고 들으며 참여할 수 있는 기회가 과연 몇 번이나 올까 하는 마음에 나는 모든 불편함과 음침한 느낌을 감수하기로 했다.


 드디어 경내 중앙에 있는 한 라마승이 작은 징을 침과 동시에 본격적인 법회가 시작되었다. 그러자 법회에 참석한 모든 티베트인들은 하나 같이 한 손에는 경통을 돌리면서 티베트어로 주문 같은 경문을 읊조리기 시작했고, 모두가 동시에 활불이 앉은 곳을 바라보며 한 방향으로 자세를 고쳐 앉았다. 


 대법당의 내부는 입구를 중심으로 모두 다섯 줄로 이루어진 긴 좌석과 그 끝에 활불이 앉을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높은 상좌, 그리고 그 뒤로 수많은 불상들이 안치되어 있는 구조로 이루어져 있었다. 긴 좌석 사이로는 높은 건물의 지붕을 떠받들고 있는 기둥이 세워져 있었고 법당의 가장자리에는 야크 버터로 만든 수백 개의 작은 초들이 항시 불을 밝히고 있었다. 


 따거를 따라 들어간 자리는 가장 깊숙한 뒷자리였다. 그곳에서는 활불의 뒷모습과 옆모습을 간간히 볼 수 있었다. 티베트 사람들은 모두 활불이 앉아 있는 높은 좌석을 향해 무릎을 꿇고 경건한 모습으로 앉아 있었고, 긴 좌석에 앉아있는 라마승들은 자신들의 앞에 놓인 경문을 정해진 순서에 맞추어 읊조리고 있었다. 많은 승려들 중에 한 늙은 라마승이 낮고 굵은 저음으로 티베트어로 경문을 선창하면 뒤이어 수십 명의 젊은 라마승이 더 음침하고 굵은 목소리로 또 다른 경문을 외웠다. 간간히 징을 비롯한 이름을 알 수 없는 티베트 전통 타악기 소리가 섞여 나기도 했다. 모든 법회가 티베트어로 진행이 되었기 때문에 나는 단 한마디의 말도 알아들 수가 없었다. 아마도 나의 추측으로는 티베트 불교의 질의 형식의 독경인 것 같았다. 나는 그렇게만 추측할 뿐이었다. 


 그들은 목소리뿐만 아니라 처음 여러 가지 악기들을 사용해 그들의 독경에 리듬과 음을 맞추었다. 그러자 악기와 수십 명이 동시에 읊조리는 굵은 저음에 법당 전체에 음산하고도 신비한 기운이 감돌았고, 경내는 그 음침한 목소리에 진동하기 시작했다. 그 반복적이고 음침한 독경소리가 나는 그리 썩 기분 좋게 들리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또 그렇게 심하게 싫지만도 않았다. 단지 나의 혼도 그러한 음침한 신비감에 빠져드는 그런 기분이었다. 그렇게 한 시간이나 단 일분도 쉬지 않고 독경이 지속되었다. 경내는 여전히 춥고 음산했으며, 이러한 환경이 경내를 더욱 경건하게 만들어갔다. 나는 곧 정신이 몽롱해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독경이 지루해질 때 즈음에 모든 소리가 가라앉고 드디어 높은 상좌에 앉은 활불 혼자서 법문을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내가 보기에 활불은 다른 라마승들과는 다르게 상당히 늙고 힘이 없어 보였지만 무언가에 사로잡힌 듯 신비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신비함은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히 타인으로 하여금 발견되어지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영적인 선각자나 많은 수련을 거친 이들에게는 보통 사람들에게서 볼 수 없는 영적인 신비함이 깃들어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혼자만의 상상을 해보았다. 다른 라마승들이 독경을 하는 동안에도 사람들이 계속적으로 그 활불에게 다가가 새하얀 하다와 보시를 바치며 성불을 기원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러면 활불은 그들에게 하다를 목에 다시 걸어주고 뭔가를 조용히 말하고는 머리에 물을 몇 방울 뿌려주었다. 나는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참으로 경건하고 순수한 사람들이었다. 무어라 할까. 한국에서 보았던 그런 맹신이나 광신적인 모습이 아니라 자신의 삶 전체가 하나의 신앙이고, 그러한 신앙의 고백으로서의 행위들이 자연스럽게 티베트인의 경건함과 순수함을 나타내 보여 주는 것 같다고 해야 하나. 어쨌든 나는 지금껏 그러한 경건함과 순수함을 단 한 번도 이렇게 눈앞에서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활불과 마주하는 그들은 정말이지 순수하고 경건해 보였다. 


 이 마을의 티베트 사람들은 그 한순간을 위해 각 마을마다 적게는 수년에서 길게는 수십 년을 기다려 활불을 맞이했고, 활불의 말대로 자신이 성불할 것이라는 믿음을 소유하게 된다고 했다. 이러한 예법이 끝나고 나자 그들은 활불을 향해 전신이 땅에 닿도록 절을 하고 환희와 기쁨에 찬 얼굴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나는 분명히 그들의 눈동자 속에서 그러한 환희와 경외심이 가득 찬 눈빛을 보았다. 그리고 놀랐다. 그들에게 있어 티베트 불교는 하나의 종교라기보다는 하나의 삶, 그 자체라는 사실을 처음으로 온몸으로 뼈저리게 느꼈기 때문이다.


 몇십 분간의 독경이 끝나자마자 모든 사람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활불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았다. 나도 사람들을 따라 무심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곧 활불은 무언가가 들어있는 주전자를 향해 어떤 말을 하고는 다른 젊은 라마승에게 그것을 전달했다. 그 젊은 라마승은 그것을 받아 들고는 천천히 모든 사람에게 주전자에 든 검은색 액체를 따라 주기 시작했다.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두 손에 받아 마시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그것을 두 손에 받은 후 머리에 붓기도 했다.


 나의 차례가 되어 나도 그 물을 두 손에 받아두고는 도대체 무슨 액체인가 싶어 맛을 한번 보기로 하고 손바닥에 곳인 검은 액체의 맛을 보았는데 무슨 김 빠진 콜라처럼 달콤하면서도 톡 쏘는 맛이 났다. 나는 그러한 의식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그저 남들이 하는 대로 무의식적으로 따라 하기로 했다. 그렇게 모든 사람에게 그 물을 다 나누어준 후에 활불은 법회가 끝나 법당을 나가려고 다른 젊은 라마승에 부축을 받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만큼 활불은 나이가 많아 자신의 몸조차 가눌 수 없을 정도로 늙고 쇠약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티베트 사람들은 한 번이라도 더 그 늙은 활불의 얼굴을 보기 위해 소란을 떨었고, 활불이 지날 갈 때마다 고개를 숙였고, 눈을 직접 마주치지 않도록 조심했다. 그리고 그가 지나가는 길옆에서 모든 사람들이 전신을 땅에 눕히며 절을 해댔다. 정말로 놀라운 광경이었다.


 나는 법회가 진행되고 끝이 나는 동안 분명히 그들 가운데 어떤 영들이 존재하고 있음을 느꼈다. 그 추운 날 차가운 마룻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몇 시간이고 요동조차 하지 않고 법문을 듣던 그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과연 무슨 간절한 염원이 깃들어 있는 것인지, 그 염원의 뜻을 넘어선 그 경건한 의식에 참여하는 그들의 눈이 나에게 굉장히 큰 인상을 심겨 주었다. 그리고 그들의 눈빛은 내가 청두의 장족 거리에서 보았던 그 사람들의 그 눈빛과 똑같은 것이었다. 신기한 일이었다. 멀리 떨어진 전혀 다른 사람에게서 똑같은 눈빛을 보다니. 아마도 육체를 벗어난 동일한 영혼이 이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것이 아닐까 하고 나는 생각했다.  



 모든 법회가 끝나고 사람들은 하나둘 자리를 정리하고 밖으로 나갔다. 우리도 그들을 따라 나가는 방향에 맞추어 입구를 찾았다. 티베트 인들은 법회를 마치고 법당을 나갈 때는 항상 시계 방향으로 움직여 나간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모든 사람들이 정말로 시계 방향에 맞추어 입구로 사라져 가는 것이었다.


 밖으로 나가보니 안개와 구름으로 가득했던 아침과는 달리 어느새 하늘은 맑게 개어 있었다. 조금은 따사로운 정오의 태양빛이 주변의 화려한 색깔들과 어울려 아름답게 느껴졌다. 먼저 법당을 나온 티베트인들은 모두들 활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다. 그들도 생전 처음 보았던 그 활불의 강렬한 인상에 몹시 흥분한 듯 보였다. 그러나 나는 그들을 보며 다른 생각이 들었다. 처음으로 참관했던 라마불교의 법회는 나에게 많은 것을 새롭게 생각하게 만들어 주었고, 어떻게 해서 이 높고 거친 땅에 이렇게 강렬하고도 경건한 종교성이 만들어질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점도 남기게 되었다. 또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라와 민족과 역사를 송두리째 중국에 빼앗긴 티베트인들의 진정한 정체성에 대해서도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따거는 법회에 참관한 사람들에게 이제는 법회도 끝이 났으니 다 같이  대법당 앞에서 기념사진을 함께 찍자고 했다. 우리는 따스한 햇살을 받으며 황금빛 지붕 아래에서 긴 여정의 시작을 알리는 일종의 의식을 함께 치른 듯한 만족한 표정으로 사진을 찍고 난우쓰를 빠져나왔다.


 

매거진의 이전글 캉딩, 두번째 이야기 :도보 여행자들을 만나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