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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몰린 Jan 06. 2023

EPC프로젝트 순서, 그리고 지연

프로젝트의 간략한 절차 그리고 공사를 지연시키는 몇 가지 이유들


“야, 윤성지. 너는 왜 맨날 나가는 데가 중동이냐? 유럽, 미국 이런 데는 못 가는 거야?” 


“박사장. 너 유럽이나 미국에서 공장 짓는다는 뉴스 본 적 있어? 없지? 그래서 못 가는 거야. 나는 플랜트 현장에만 가니까, 공장 짓는 곳에만 가는 거지.” 


가장 친한 친구 중 하나인 박동혁이다. 같은 초등학교, 고등학교, 대학교를 다니면서 많이 친해졌다. 대학에서 동혁이는 건축공학을 나는 정보통신 공학을 전공했었다. 동혁이는 집안 사정을 생각해서 취업을 포기하고 부모님을 도와서 식당을 운영하고 있다. 해외프로젝트에 발령받았다는 핑계로 불러내서 둘이 한 잔 마시고 있는 중이다. 


“그런가. 이번에 나가면 언제 돌아오는 거야?” 


“공식적인 프로젝트기간은 39개월인데, 내 생각에는 한 4~5년은 걸리지 않을까 싶은데?” 


“야, 공식 기간이 있으면 맞춰야 지. 우리나라 대기업이 그거 하나 못 맞추냐?” 


“야, 나는 이제까지 공사기간 맞춘 플랜트 현장이 있다는 이야기를 못 들어봤다. 공식 기간이 39개월이면, 아마 24개월은 더 늘어질걸? 지켜봐. 내 말이 맞나 틀리나.” 


"그래? 뭐 건설회사에 다니질 않으니 알 수가 있어야지. 그냥 술이나 먹자."


"고맙다. 그래도 이렇게 갑자기 불러도 나오는 건 너밖에 없다."


"어, 이거 은근 기분 나쁜 멘트인데? 내가 결혼 안 해서 한가하다는 이야기를 돌려서 한 거지, 방금?"


"야. 아냐. 정말 고마워서 그래. 고맙다, 친구야."


 친한 친구와 즐겁게 술을 마시고 지하철을 타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 괜히 기분이 씁쓸해졌다. 아까 동혁이에게는 아무렇지 않은 듯 4~5년이 걸릴 것이라고 이야기했지만, 내가 사우디에 있어야 하는 기간이 정말로 4~5년이 될 수 있다. 과연 내가 해외프로젝트에서 4년 이상을 견딜 수 있을까? 이번 프로젝트는 전에 내가 했었던 프로젝트들과 다르게 별문제 없이 진행될까? HVAC와 많은 간섭을 만드는 건축, 전기, 계장 등 다른 팀 사람들과 잘 지낼 수 있을까? 협력업체나 Vendor는 일을 잘하는 업체를 만날 수 있을까? 수많은 질문이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들고 있었다. 


'됐다. 뭐 프로젝트를 나 혼자 하는 것도 아니고... 나 혼자 고민해봤자 달라질 것은 없잖아. 그냥 한국에 있을 때 가족들이나 친구들과 조금이라도 더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게 답이다.'


내일은 오랜만에 어머니께 전화를 드려야겠다.




Turn Key라고도 불리는 EPC 프로젝트는 설계부터 시공 및 시운전까지 시행사에서 책임지고 완료하는 종류의 계약을 이야기한다. 즉, 발주처인 COMPANY는 FEED(Front End Engineering Diagram)라는 개략적인 설계를 시행사에 제공하고, 선정된 시행사가 상세설계를 진행하여 해당 공장을 건설하고 발주처에 넘겨주게 된다. 


간단하게 정리한 EPC 프로젝트의 진행순서는 아래와 같다. 

1. 입찰 : 발주처가 시행사를 초청해서 프로젝트 관련 정보 및 자료를 공유한 후에 시행사가 제출한 프로젝트 수행 금액을 검토하여 프로젝트를 수행할 시행사를 선정하는 과정으로, 보통 수개월이 걸린다. 이 과정에서 시행사는 기술적, 계약적으로 필요한 정보를 발주처에게 문의하여 확인하고 프로젝트 수행 계획을 수립하여 예상 금액을 산정해야 한다. 

 

2. 설계 : 일단 프로젝트를 수주하게 되면, 시행사는 최대한 빨리 시공도면을 발주처에 제출하여 승인받아야 한다. FEED 도면에는 개략적인 공장의 생산량 및 필요한 설비의 종류 및 용량 정도만 명시되어 있으므로, 공사를 할 수 있는 도면은 모두 시행사에서 작성하여 발주처 승인을 받은 후에 공사에 사용될 수 있다.

 

3. 구매 : 프로젝트에 필요한 기계나 장비를 구입하는 과정이다. 구매를 위해서는 필요한 기계 및 장치의 종류 및 상세 용량이 필요하므로, 관련된 설계가 모두 완료된 후에 시작할 수 있다. 


4. 시공 : 발주처에 승인을 받은 시공도면 (IFC : Issued For Construction)에 따라서 공장을 만드는 과정이다. 일반적으로 공사부지를 정리해야 하는 토목 팀이 가장 먼저 현장에 투입되고, 가설사무소 및 작업자 숙소 건설 등의 작업이 완료된 후에 나머지 팀들이 투입된다. 


5. 시운전 : 시공된 기계, 장치, 배관, 케이블들이 제대로 기능하는지 확인하는 작업으로, 생산 설비를 가동하기 전에 관련된 모든 공사결과품들을 확인한다. 시운전의 최종목표는 발주처가 FEED에 명시한 용량 및 품질 기준대로 최종생산품을 생산할 수 있는지 확인하는 것이다. 


6. 준공 : 공사가 완료되고 공장이 가동되기 위해서 필요한 준비가 완료됐는지 정부의 검사를 완료한 상황으로, 시행사는 하자공사를 제외하고 모든 업무를 완료한 상태를 뜻한다. 이 상황이 되면 시행사는 업무가 완료된 시공 엔지니어들을 복귀시키고 일부의 인원으로 하자공사 관리 및 프로젝트 청산을 진행한다. 


위에 언급한 절차들 중 일부는 동시에 진행된다. 특히 설계, 구매, 시공은 전반적인 수행 기간이 겹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리고 어떤 일부 공사가 완료되면 관련된 시운전은 바로 연달아 진행해서 완료시켜야 하는 경우도 있다. 

  


이제까지 내가 지켜본 프로젝트들의 공식 수행기간은 보통 39개월에서 56개월이다. 이는 공사의 난이도 및 규모를 고려해서 입찰 시에 예상으로 만들어진 계획으로,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상황에 따라서 발주처와 협의하며 조정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수개월동안 기초적인 개념만을 가지고 진행하는 입찰의 특성상, 정확한 공사기간을 예측하는 것이 불가능한 경우가 많다. 또 최저가를 제출한 시행사가 선정되는 경우가 많은 해외 EPC 프로젝트의 특성상, 어떤 경우에는 프로젝트 수주를 위해서 시행사가 전략적으로 공사기간을 적게 잡아서 전체 공사 금액을 낮추는 경우도 있다. 


간단하게 정리하면, 프로젝트 수주 시에 발표하는 공사기간은 정확하지 않은 정보를 토대로 예상한 개략적인 예상일 뿐이고, 프로젝트 수주를 원하는 시행사가 전략적으로 짧은 공사기간을 제시하는 경우도 있다. 이것이 해외 EPC 프로젝트가 예상보다 지연되는 첫 번째 이유이다. 게다가 발주처(COMPANY)는 고의적으로 시행사에 입찰 기간을 짧게 주는 경우도 있는데, 사우디 아람코가 그런 것으로 악명 높은 회사 중 하나이다. 3개월의 짧은 입찰 기간에 완벽하게 프로젝트를 분석해서 정확한 공사기간을 산정하는 것은 사실 거의 불가능한 일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두 번째로, 우리나라 건설회사들은 시운전을 가볍게 여기는 경우가 많이 있다. 예를 들어서, 전체 공사기간이 39개월이면 60% 상세 설계에 6개월, 시공에 30개월 (60% 상세설계 완료 후), 시운전에 3개월 이런 식으로 프로젝트 수행 계획을 세우는 경우가 많다. 즉, 3개월 동안 어떻게 시운전을 진행할 것인지에 대한 세부 계획도 없이, 그냥 시운전 기간을 2~3개월로 정하는 것이다. 


시운전을 경험해본 엔지니어들은 알겠지만, 일반적으로 시운전의 종류 및 방법은 공사 중에 발주처와 협의해서 정해진다. 즉, 입찰 때에는 어떤 종류의 시운전을 어떻게 진행해야 하는지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이런 경우, 기존에 수행했던 프로젝트의 경험을 토대로 예상해야 하는데, 시운전 기간을 길게 잡으면 프로젝트 수행기간이 길어져서 예상 원가가 높아지므로, 시행사는 일부러 2개월 혹은 3개월로 시운전 기간을 낮춰서 입찰 금액을 조절하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다시 말해서 입찰 때 시운전에 필요한 기간은 전혀 반영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세 번째로, EPC의 설계는 각 공종 별로 서로 영향을 주고받아서 빨리 완료하는 것이 극히 어렵다. 예를 들어서, 어떤 건물 안에 들어갈 에어컨의 용량은 건물 내부의 발열량 및 건물의 크기를 고려해서 산정해야 한다. 즉, 전기 및 계장 시스템들의 발열량을 알아야 하고, 건물의 크기(정확히는 내부 공간 크기)를 알아야 에어컨의 용량을 정확하게 산정할 수 있다. 하지만 전기와 계장 시스템은 연결될 장비의 종류, 대수, 용량 등이 확실하게 정해져야 그 발열량을 계산할 수 있다. 결국 공정(Process), 기계, 전기, 계장, 건축 등의 설계가 완료된 후에 에어컨의 정확한 용량을 계산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정보를 설계 초기에 확실하게 계산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또 프로젝트 중간중간에 설계가 변경되면 그 계산 결과는 다시 한번 달라져야 한다. 


이처럼 여러 이유로 지연된 설계는 주요 기계 및 장비의 구매 지연을 야기한다. 그리고 이는 기계 및 장비의 크기 및 용량의 확정을 지연시킨다. (보통 용량에 따라서 기계 및 장비의 크기가 달라진다.) 이는 기계 및 장비의 기초(Foundation, 기계 및 장비를 올려놓는 받침)를 만들어야 하는 건축 및 토목 팀의 공사 일정에 영향을 준다. 또 기계 및 장비의 용량 산정 지연은 해당 장치의 제작을 지연시켜서 현장에 늦게 도착하게 만들게 되고, 이는 결국 관련된 설치 공사의 지연을 만든다.  


이 외에도 라마단(이슬람을 믿는 사람들은 라마단인 한 30일 동안 일출과 일몰 사이에 음식 섭취가 금지된다. 보통 라마단 기간에는 오전 근무만 가능하다.)과 같은 종교적인 이유, 코로나와 같은 물류 및 인원의 지역 이동 제한 상황, 국제 경제 상황변동에 따른 원자재 가격의 급격한 변동, 너무 잦은 비 혹은 눈, 너무 덥거나 추워서 공사를 진행할 수 없는 날씨 등은 EPC 프로젝트의 공사 지연을 만드는 흔한 이유들이다. 그리고 이런 이유들은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하여 해외프로젝트를 수행하는 엔지니어들을 괴롭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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