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과 사를 구분합시다.
해외 주재원 파견을 나오면, 남편도 아내도 내향적 I의 성향이 외향적 E로 바뀌어야 하는 상황들이 종종 생긴다. 한국에서는 없던 문화, 사실상 접할 필요성도 없는 모임 문화, 골프 문화, 접대 문화, 꼰대 문화 등으로 인해서 사실상 업무에 관련 없는 소모적인 일들이 발생하기도 한다. 굳이 그 문화를 따라갈 필요도 없지만, 내향적인 주재원 와이프의 생활을 하면서 겪고 보고 듣고 느낀 점들을 생각나는 대로 기록하려고 한다. 브런치는 그런 입장에서 훌륭한 플랫폼이다.
한국과 같은 계열의 회사라고 해도 주재원으로 나온 타지에서의 회사 분위기는 한국과 많이 다르다. 이곳에서는 공적인 상사와 부하 직원의 관계가 가족 관계로도 넓혀져서 사적인 영역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물론, 직급이 같거나 평소에 형, 동생 하며 사이가 좋은 관계에는 타지에서 서로 도움을 주고받으며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이웃으로 발전할 수 있지만, 보통은 상급자와 부하 직원 사이에서의 애로사항이 많이 생기고, 그 관계가 회사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업무가 끝난 시간에도 수시로 개인 톡을 보내거나, 전화를 하는 등의 모습으로 공과 사가 없어지는 모습이 많이 보인다.
상급자와 부하 직원은 회사에서 존재하는 공식적인 관계라서 그들이 풀어야 할 문제라고 치자. 그렇다면, 그 주재원의 와이프들끼리 서로 알아야 할 이유가 무엇일까? 그들이 만나서 할 이야깃거리와 주제는 과연 무엇일까. 그냥 내가 이웃끼리 만나서 시시콜콜 집안에서 일어나는 대소사를 공유할 수 있는 마음의 거리를 충분히 좁힐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일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대화하기를 좋아하는 여자들 특성상 말이 많다. 작은 사실이 눈덩이처럼 살이 붙어서 이곳저곳으로 소문이 만들어져서 전달되기가 딱 좋은 곳이다. 이 좁은 해외라는 곳, 외롭다는 점, 시간이 많다는 점, 그나마 나와 의지할 사람이 있다는 공통점으로, 같은 회사의 아내들은 여느 수다 모임처럼 남편들 이야기를 하게 될 것이다. 그 남편들은 같은 회사의 직급이 서로 다른 사람들이니, 또 자연스레 직급에 따라서 아내들의 서열도 나뉠 테고, 남편을 위해서 잘 보이고 싶은 여자들은 내조의 여왕 노릇을 할 것이다. 주재원은 서로 각자의 발령받은 주재 기간이 다르고, 서로의 귀임 날짜가 다 틀리므로 구애를 해야 하는 상대는 계속 바뀌기 마련이다.
나는 처음부터 주재원 와이프 모임을 거절했다. 초기 정착 시절, 비자 발급을 위해 우리와 같이 중국에 들어온 남편과 친한 동료의 아내와 같이 택시를 타게 되었다. 물론 초면이었다. 그녀는 샤랄라 한 꽃무늬 치마를 입고, 주렁주렁 액세서리를 단 말괄량이 느낌의 소녀 같은 분이었다. 말이 많지 않은 내가 흥이 많은 그녀에게 들은 이야기는 대다수 이러했다.
어머, xx님, 어제 술 많이 드셨다던데 괜찮으세요?
우리 남편이 그러는데 고생 많이 한다고 하더라고요.
xx랑 곧 또 회식이 있는데, 누가 누가 어쩌고 저쩌고,,,
다음 주에 회사 와이프들 모임 있는데 가세요? 전 한 번 가보려고요.
남편이 회사 이야기를 하지 않아서 잘 몰랐던 사실들을, 나는 그녀를 통해서 남편의 회사 생활을 들을 수 있었다. 사실 내가 관심 있는 이야기도 아니고, 한국에서 겪지 않은 이런 류의 주제가 불편했다. 주말에 무식한 회식으로 술병이 나서 힘들어하는 남편 이야기는 그녀에게 하지 않은 채, 이 밝디 밝고 명랑한 나보다 어린 그녀의 순수함에 좀 걱정이 됐었다.
그녀의 가족은 작년에 한국에 돌아갔다. 귀가 얇고 팔랑대던 이 맑은 친구는 중국에서 만난 여자 지인에게 몇 천만 원의 사기를 당한 채, 남편의 속을 박박 긁어놓고 돌아갔다. 노후를 빌미 삼아 순식간에 당해버렸다. 이곳은 좁다. 정신 차리지 않으면 눈 뜨고 코 베일 수 있는 곳이다. 그날이 그녀를 본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지만, 그녀의 여러 스토리를 들으면서, 그녀의 맑은 눈과 청량한 목소리가 아직도 생각이 나고 너무 안타깝고 내가 다 속상하다.
그의 남편 역시, 우리 남편보다 직급은 아래지만, 나이가 같고, 한국에서도 친했던 사이라서 남편들끼리 이 텃새 많고 어려운 주재원 생활에서 끈끈하고 서로한테 의지를 많이 했던 사이다. 지금도 수시로 안부 묻고 소식 전하고 연락한다고 들었는데, 이처럼 그 둘의 회사에서의 우정이면 충분하지 않을까.
공과 사가 구분되는 주재원 생활이길 바란다. 아내들은 아이를 교육시키고 남편을 내조하기 위해서 가족으로 동반한 것이지, 회사 사회생활의 일원으로 온 게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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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