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재원 발령 후, 중국 호텔 한달살이
비록 1박 2일의 중국 투어에서 집을 구하지 못했지만, 몇 달 뒤에 중국에서의 첫날은 안정된 생활을 하고 있을 거라고 나름 꿈을 꾸고 있었다. 우리가 집을 구하지 못할 거라는 예상은 우리 사전에는 없었다. 한국에 돌아간 뒤로, 중국 부동산을 통해서 계속해서 집 사진들의 정보를 받으며, 어떤 집을 골라야 할지 예의주시하며, 동시에 회사에서 지원해 준 이사업체를 통해서 인생 첫 해외이사를 준비하게 되었다. 국내 이사와 달리 수입통관에 필요한 서류 및 북경 통관을 위한 거류증이 필요했고, 운송금지 및 제한 품목들에 유의해서 짐을 부쳐야 했다. 우리의 컨테이너는 중국 입국날짜로부터 보름 뒤에 출항 예정이었고, 그때까지 배로 보낼 중국에서 필요할 것 같은 온갖 생필품을 사재기에 바빴다. 아이가 읽을 한국책을 몇 년치 준비하기도 했다.
우리 집의 대형 가구, 가전 등의 물건들을 처분하고, 비우고 또 채우기에 하루를 보내며, 아이가 다니던 초등학교도 정리하고 집도 내놓고 2달 반 만에 모든 일을 마무리했다. 모두 처음 해보는 일들이라 삐걱대기도 하고, 실수도 많고,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그래도 일정이 끝나면 마무리가 되는 일이었다.
출국일이 다가올수록 베이징에서 살 집을 구하지 못하자, 불안감이 커져갔다. 서울집은 내놓은 상태, 항공권은 구입 상태, 비자도 나온 상태, 남편의 출근 날짜도 정해진 상태인데, 집을 구하지 못했다고 우리의 일정을 변경할 수는 없었다.
결국 우리는 취사와 세탁이 가능한 레지던스와 조식 뷔페가 있는 한인타운의 호텔 중에서 한 곳을 골라서, 그곳에 한 달 머물면서 집을 구하기로 했다. 잦은 이사로 오피스텔에 보름 정도 단기 거주 경험이 있어서, 레지던스 대신에, 이때 아니면 언제 호텔살이를 해보겠냐며, 매일 아침 조식 뷔페를 먹으며 편안하게 쉬는 우아함을 상상하며 호텔 한달살이를 하게 되었다.
처음 해보는 장기투숙 호텔살이는 꽤 할 만했다. 원래 사진을 통해 본 방 사이즈는 작았는데, 무슨 이유 때문인지 룸업그레이드를 받아서 큰 방에서 지내게 되었다. 집이 없는 상거지들은 이민가방을 포함해서 총 8개의 가방을 가지고 호텔까지 이동하느라고 뼈마디가 아팠다. 인천공항에서는 동생들과 헤어지며, 또 부모님과 통화를 하며 다시는 못 볼 사람처럼 울고 왔는데, 하루 이틀이 지나고 나서는 현지에 적응하느라고 가족 생각할 틈이 없었다. 중국은 '주숙등기'라는 것을 해야 해서, 여권 제출이 필요했는데, 아무리 뒤져봐도 여권이 없었다. 저 가방 7개를 다 뒤져도 안 나오자 패닉에 빠져서 다시 한국을 가네마네 하면서 사람 잡던 일을 시작으로, 은행 계좌 개설, 핸드폰 개통 등 하루가 너무 빠르게 돌아갔다.
다행히도 한국에서 집안일에 쪄들어 있던 내게, 매일 아침 깨끗한 침구 정리는 물론이고, 어질러져 있는 방을 늘 아침마다 깔끔하게 치워주고, 일어나면 아이 1인분만 돈을 추가해서 매일 같이 한국식 밥과 서양식 뷔페와 과일도 종류별로 골라먹을 수 있는 조식 뷔페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이는 중국 도착 후, 바로 국제학교에 입학을 했어서 아침마다 조식을 먹고 스쿨버스를 타는 생활을 했다.
학교 갔다 오면 근처의 뚜레쥬르 빵집에 들러서 매일같이 한국빵을 사 오고, 동네를 걸어 다니며, 동네 투어와 마트 탐방에 바쁘던 하루였다. 쇼핑몰에는 김종국 님의 광고가 걸려있었고, 친근한 호비를 보고 한국 생각이 나기도 했다.
회사에서 지원해 주는 금액으로 이런 호텔 생활을 무료로 할 수 있는 화려함에 행복하던 것도 잠시, 2가지의 문제점이 발생했다. 내가 먹을 점심과 가족이 먹을 저녁 식사 해결이 어려웠다. 한인 식당과 배달 업체 소개를 받아서 몇 번 시켜 먹고 식당을 방문해서 먹었지만, 매일 2끼를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쇼핑몰에서의 외식도 몇 번 먹다 보니 질리기 시작했다. 결국 마트에서 중국 밥솥과 쌀, 한국 저장 반찬, 설거지용 수세미와 세제를 사서, 점심과 저녁은 호텔에서 여행객과 난민의 그 어디쯤의 모습으로 밥을 해 먹었다. 그나마 한국에서 혹시 몰라서 설렁탕, 미역국, 육개장 등의 레토르트 파우치를 사 온 게 도움이 되었고, 반찬은 늘 짜디짠 저장반찬과 김을 먹어서 점점 몸이 붓기 시작했다.
또 다음은 빨래의 문제였다. 주변에 코인 세탁이 당연히 있을 줄 알고, 호텔 로비에 안 되는 중국어로 세탁실을 문의했지만, 세탁실은 준비되어 있지 않아서 결국 세탁 세제와 빨래판을 사서 화장실에 쪼그려서 속옷, 양말, 겉옷을 손빨래하고, 호텔 창가에 한국에서 사 온 여행용 빨랫줄을 걸어놓고 빨래를 하기 시작했다. 여름이라 다행이었지, 겨울이었으면 빨래도 못할 판이었다. 순식간에 화려함은 어디로 가고, 화장실 세면대에서 설거지를 하고, 샤워실에서 손빨래를 하는 베이징 난민이 되었다.
안 되겠다! 집을 빨리 구해야겠다!
남편은 출근하고, 아이가 학교에 가면, 나는 조선족 부동산 담당자를 만나서 열심히 집을 보러 다녔지만, 시기가 또 이미 학기가 시작한 시점이라 마음에 드는 집을 찾기가 정말 쉽지 않았다. 이제는 한인타운이고 뭐고, 그냥 단지 하나를 정해서 적당한 가격과 햇빛만 잘 들면 들어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더 이상 화려한 옷을 입은 난민 거지로 살고 싶지 않았고, 호텔살이에도 한계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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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 Unsplash의 reisetop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