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장님, 독수리타법 사원도 뽑으시나요?
(남편) 저기, 애 방학 때 한글이랑 영어 타자 연습 좀 시켜봐.
(나) 쟤, 내 말 안 듣지, 주말에 자기가 시켜봐.
(남편) 옆에 딱 앉혀놓고 시켜.
아들이 일어났다.
(나) 아들! 이리 와봐! 방학 때 타자 손가락 연습 좀 하자. 한글도 좀 칠 줄 알아야지.
(아들) 왜? 나 잘 치는데?
(나) 아니, 한 손가락으로만 타자 치고 그러면, 나중에 손가락 관절염 오고 아파.
(아들) 알았어, 손가락을 돌아가면서 칠게.
(나) (웃음 참음) 아니, 그게 아니라. 보기에도 안 좋지. 나중에 대학 가고, 회사 다니면 멀쩡한데 독수리타법으로 일하고 그러면 좀 별로지 않아?
(아들) 괜찮은데? 누가 신경 써?
(나) 회사 가면 동료 직원들도 웃기다고 할 거고, 사장님도 뽑아주지도 않을 걸.
(아들) 내가 회사 차리고, 웃지 말라고 하면 돼. 그리고, 지난번에 서류 입력할 때 엄마가 타자 빠르다고 했는데, 결국 시간 내에 못 한 거, 내가 해줬잖아. 그래서 페이지 넘어갔잖아.
(나) 그땐 그랬지.
결국,,, 별생각 없는 아들 녀석의 말재간을 이길 수가 없다. 국제학교 방학 3주 간, 남편은 아들한테 타자 연습을 하면 어떻겠냐고 아들이 아닌 나에게 넌지시 이야기를 꺼냈다. 회사에서 직원들의 잦은 실수와 꼼꼼하지 않은 일처리에 사건이 터진 걸 수습하는 과정에서 스트레스를 꽤 받은 날이었다.
어느 날 아침, 갑자기 그의 의식의 흐름이 아들로 향했다. 방학 내내 맨날 늦게 일어나고, 아이패드만 붙잡고, 하루 종일 레미제라블, 오페라의 유령 등 뮤지컬 노래만 무한 반복 듣고 부르고, 그런 모습에 아들의 미래가 걱정되었나 보다. 내가 집에서 볼 때는 그래도 컴퓨터 켜놓고, 이것저것 뭐 하는 것 같은데, 그런 모습을 볼리 없는 아빠는 갑자기 아침을 먹으면서, 나에게 숙제를 주었다. 아들 타자 연습 좀 제대로 시켜야 할 것 같다고.
몇 년 전부터 아들의 독수리타법을 보며, 처음에는 귀엽고 웃기고 신기했는데, 이제 좀 걱정이 되나 보다. 나는 뭐, 어차피 내가 시킨다고 각 잡고 앉아서 할 애도 아니고, 아들 말처럼 우리보다 빠른 타법으로 우리 일에 도움 준 적도 있고, 뭔가 근거를 가지고 설득을 해야 하는데 그럴 말한 뾰족한 대책이 없다. 그래서 그냥 놔두고 있는데, 아빠는 걱정이다.
국제학교에서도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굳이 터치하지 않기도 하고, 아들의 타자 치는 모습을 보면, 다행히도 주먹을 쥐은 채 손가락 하나씩만 펴서 치지는 않으니, 독수리타법이 맞는지 아닌지 자세히 보면 모른다. 이 독수리타법으로 영어 Essay도 곧잘 좋은 성적을 받으니 우리가 할 말은 없다. 자기가 할 일을 해내고 있고, 독수리타법이 아직까지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걱정되는 건 , 오른손이 유난히 바쁘다. 저거 분명 나중에 손가락이나 손 어딘가에 슬슬 통증이 올 텐데, 아이는 전혀 문제 삼지 않는다.
남편은 아들의 향후 미래 회사 생활을 걱정하고, 나는 아들의 손목터널 증후군과 손가락 관절염을 걱정한다. 아이가 평상시 타자 치는 모습을 영상으로 찍어보았다.
한글을 쓸 일이 별로 없어서 위챗이나 메시지를 쓸 때 좀 느린 편이라서 방학 때 한글 타자는 좀 해보라고 권유를 해야 할 것 같다. 아들한테 한글 타자 연습하라고 하니, 한글 자판이 있는 컴퓨터를 사면 된다고 그럴듯한 핑계를 또 대니 천하무적이다. 학교에서도 타자 치는 방법에 대해서 지적을 한 적이 없다고 했는데, 한국 사회에서는 조금 말이 달라질 것 같긴 하다. 상상을 해보았다. 어디 공공기관이나 회사에서 직원이 독수리타법으로 열심히 치며 업무를 보는 모습을. 이것 또한 남의 시선을 의식하는 것인지, 타자의 자유를 인정해줘야 하는지 어렵다.
오늘 나는 예전 노트북을 꺼내어서 충전 중이다. 혹시나 아들이 독수리타법을 버리고 제대로 된 손가락 자판 위치를 익히지 않을까 해서 말이다.
아빠는 또 회사에서도 아들을 향한 메시지를 보내기 시작했다. 아들한테 전달해 주니, "왜 나를 괴롭혀? 한다고!" 하며 입은 배시시 웃더니, 아빠한테 장난을 쳐놓았다. "이미 한대. 너무 대견하고 잘해." 누굴 이기니,,, 아빠는 꿋꿋하게 하루에 1시간씩 1주일이면 금방 익숙해진다며, 이야기를 하고 아들도 마지못해, 컴퓨터를 열었다.
오! 웬일로 한글 타자 연습을 시작했다. 한참을 하더니, 아들이 박장대소하며 나를 부른다.
엄마! 나 불량됐어. 점수 0점 받으니 불량 이래.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오로지 아들의 관심은 타자 못 쳐서 불량이 된 자신한테 프로그램이 이렇게 말할 수가 있냐며 깔깔거리고 난리가 났다. 2014년에 만들어진 한컴 타자연습인데, 이제 막 배우는 입장에서 '불량'이라고 하니, 하려다가도 하기 싫어질 판이다.
엄마가 해보라고 해서, 나의 타자 실력을 마음껏 뽐내주었다. 어머! 난 우수야. 덕분에 아들은 한글 타자를 열심히 연습 중인데, 얼마나 갈지, 또 영타는 이미 습관이 굳어져서 고칠 수 있을지 미지수다.
불량! 불량~ 불량이래요~ 또 종일 노래를 부른다.
그나저나, 사장님! 독수리 타법 사원도 뽑으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