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마트 첫 출근, 첫 트레이닝
20여 년 만에 출근이란 걸 하게 되었다. 마트에 도착해서 떨리는 목소리로
"오늘 트레이닝을 하러 왔어요."라고 하자, 방송을 통해서 누군가의 이름이 불렸다.
테이블에 앉아서 기다리는데, 약속된 시간이 되어가자 남미 여성과 흑인 여성, 그리고 백인 남자 등의 신입 직원들이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서로 긴장한 채 말똥말똥 핸드폰과 창 밖만 쳐다보다가 눈이 마주치면 괜히 웃으며 인사 한 마디씩 하고, 서서히 얼어있던 분위기가 깨지자 서로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푸드 코트에서 일을 하고 있는 백인 미국 남자와 학교에서 일한 경력이 있는 남미 여성, 그리고 흑인 여성은 대학생이었다. 잠시 뒤, 전체 트레이닝을 담당하는 사람이 티없이 해맑은 웃음으로 인사를 하며, 개인 명찰과 앞치마, 그리고 모자를 나누어주었고, 우리들을 인솔하며 출근하면 사용할 Clock in / out 사용법부터 마트의 곳곳을 소개해주며, 사람들이 보이면 인사를 시켜주었다.
(너무 신이 나서 그날 저녁 집에 가서 모자를 쓰고 앞치마에 명찰을 달고 거울을 보며 사진을 연신 찍어댔다.)
마트의 Back을 들어가 보며 내가 보이는 마트가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에 놀랬고, 중간중간 단어를 알아들을 수 없는 상당히 빠른 말과, 외국인을 교육하고 있음을 망각한 듯한 실제 영어에 눈앞이 캄캄해졌다. 한쪽 귀로 들어온 영어는 다른 귀로 나가고, 아시안이 거의 없어서 내가 더 튀는 이곳에서의 생활을 잘 버틸지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온라인 교육을 수도 없이 끝내고 왔는데 투어 끝에, 나와 남미 여성인 안나는 다시 컴퓨터방으로 배정되어서 현장에서 해야 할 교육 트레이닝을 또 이수해야 했다. 그 남미 여성은 자신의 친구가 이미 이곳 직원이라 업무에 대한 기본 지식 외에 세세한 내부 사항까지 다 알고 온 정보통으로 자신감이 그의 큰 엉덩이만큼이나 당찼다. 거기에 더해서 사회생활의 노련함과 내게는 상당히 얄미워 보이는 잔꾀에 밉상인 구석도 보였다.
온라인 영상을 보고 지문을 읽고 최종 퀴즈를 통과해야 그 방에서 나올 수 있었는데, 계속 몇 문제에서 답도 알려주지 않은 채, "incorrect, try again"만 반복하며 오답들이 나오니 안에서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그에 반해 내 옆의 그녀는 너무나 여유롭게 교육을 하고 있었다. 중간에 하다 하다 안 돼서 그녀에게 답을 물어보았다.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냥 막 스킵해도 돼. 어차피 그 교육을 우리가 다 쓰지는 않아.
라며 슬쩍 본 그녀의 스크린은 분명히 내가 하는 내용보다 훨씬 뒤에 있었다.
퀴즈 통과를 4-5번을 못하자 점점 지쳐갔고, 누가 방에 들어오면 도움을 청하기도 했다. 그런데 분명히 나보다 느린 그 남미 친구 안나는 갑자기 자기는 다했다며 자리에서 일어나서 밖으로 나가는 게 아닌가?
저 다했어요.
너 다 했니? 그럼 준비해서 나가서 너네 팀 트레이너를 찾아.
온라인 교육을 패스하면 그때부터 진짜 내가 해야 할 'Shopper'로서의 실전 트레이닝이 시작이었다. 나만 혼자 독방에 남아서 끙끙대며 30-40분간 계속 앞으로 가서 내용을 다시 보고 내용을 사진 찍어서 퀴즈 답을 찾고, 이게 지치자 그냥 중간에 나와서 집에 가버릴까도 생각했다.
우여곡절 끝에, 가까스로 퀴즈를 통과하고 마트에 나가보니 안나는 이미 트레이너와 한참 실제해야 할 업무를 배우고 있었다. 원래 실제 업무 트레이닝이 1시간 30분이었는데, 나는 중간에 들어가는 바람에 절반 밖에 하지 못했고, 앞에서부터 내용을 듣지 않아서 중간중간에 질문이 계속 생겼다. 그 나대는 안나 뒤에 묻혀서 꿔다 좋은 보릿자루처럼 매달려 졸졸 그들을 쫓아다닐 뿐이었다.
우유나 치즈 같은 유제품은 유통기한이,,라고 트레이너가 이야기하면, 이에 질세라
아! 그거 아까 교육에서 봤어요. 며칠이요!
아주 쿵작이 그렇게 잘 맞을 수가 없었다. 직접 Shopper phone으로 업무를 해보고 싶은데 그녀는 내게 그 기기를 줄 생각도 없었다.
언짢은 내 얼굴을 봤는지 가끔 또 챙기는 척하며 "너도 해볼래?"라며 기기를 주는데 중간에 들어온 나는 헤매기 일쑤였고, 고장 난 로봇처럼 삐걱거렸다. 나는 점점 그들의 들러리와 그림자처럼 느껴졌고, 그녀와 함께 트레이닝을 며칠 더 했지만, 이해력이 느린 내가, 이미 정보가 빠삭하고 약은 그녀를 따라가기엔 무리수였다. 트레이닝이고 뭐고 그냥 그 감정 자체가 불쾌했다. 이렇게 트레이닝을 받고 실제 업무를 내가 따라갈 수 없을 것 같았다.
보스에게 이메일을 보냈다.
나는 트레이닝 기간 동안에 트레이닝을 충분히 받지 못했고, 내가 이 일이 처음이라 이해가 좀 느리다며 바로 업무를 할 수 없을 것 같으니 트레이닝을 한 번 더 해줄 수 있는지를 요청했다. 보스는 흔쾌히 트레이너와 나의 1:1 시간을 잡아서 통보해 주었다.
그렇게 드디어 트레이너를 1:1로 다시 만났다. 그제야 트레이너의 얼굴을 제대로 보았다.
그는 노란 장발의 깊은 파란 눈을 가진 젊디 젊은 미국 남자였다. 그런데 보통의 내가 생각하는 미국인들과 다르게 내향적이고 조용하지만 늘 평온하고, 말투가 다정했다. 미국에서는 눈을 쳐다봐야 한다고 들어서 눈을 마주하지만, 그의 쳐다보는 눈이 너무 깊어서 가끔은 가까운 거리가 부담스럽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그의 성격이 트레이너로서는 제격이었다.
말도 빠르지 않아서 듣기에 편했고, 몇 번을 같은 질문을 해도 언제나 처음 말해주듯이 대답을 해주었다. 또, 수줍은 듯한 미소와 이 상황이 마치 내가 넷플릭스의 주인공이라도 된 것처럼 현실과 가상현실 속에서 잠깐씩 왔다 갔다 했다. 미국인과 이렇게 장시간을 어떤 일로 인해서 있어본 적이 없었고, 평생을 전업주부로서의 말과 집안일만 하다가 그 외의 대화를 하는 이 순간의 그 설렘이 뭔가 기분이 좋았다. 보스며, 트레이너며, 다들 원어민들이라 영어가 완벽하지 않은 나는 마치 어린 부모를 둔 병아리반의 유치원생 같았다. 무언가 새로 배우는 것도 재미있었고 사람들과의 관계가 즐거웠다.
이게 바로 사회생활이구나.
그렇게 일대일로 3시간의 교육을 마치고 나서야 어느 정도 업무 파악이 되었고, 온라인 교육과 마찬가지로 완벽하게 알아야 안다고 할 수 있는 내 지독한 성격에 어느 정도 만족이 되었다. 무엇보다 기분이 묘했던 건, 쇼핑을 하면서 돈을 번다는 것이었다. 남편의 백수 생활 장기화와 동시에 우리 가족의 수입이 무일푼으로, 장을 보기 위해 마트를 가기 직전부터 물건을 하나 고르면서도 필요하다 vs. 나중에 사라 사이에서 싸우는 게 일상이었어서, 마트에 들어서는 것부터가 스트레스였다.
그런데, Shopper로 일을 하면서 다른 사람의 주문 품목으로 내가 장을 보니 대리만족도 되고 너무 재미있었다. 그동안 못한 쇼핑을 원 없이 하며 마치 마트에 숨겨진 보물 찾기를 하는 게 이런 거구나 싶었다. 미국 사람들이 어떤 음식들을 주문해서 먹는지, 어떤 브랜드들이 많이 주문되는지, 또 모르던 물건이나 내가 찾고 있던 물건들을 발견했을 때의 희열감이 컸다. 남편은 나의 이야기를 들으면 마치 내가 그곳에서 놀다가 오는 줄 착각하기도 했다.
그렇게 시프트를 잡아가며, 한국인도 하나 없고, 아시안도 거의 없는 이곳에서 '이민자'로서의 첫 발걸음을 힘차게 내디뎠다. 욕망 많은 밉상 덩어리 그 남미 친구는 결국 온라인을 끝내지 않은 게 발각되었는지 브레이크룸에서 온라인 트레이닝을 마저하는 모습을 목격했고, 그녀의 욕망과 밉상은 그때부터 슬슬 보이기 시작했다.
대문사진 출처 : Konstantin Evdokimov,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