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이 괜히 명작이 된 게 아니다
얼마 전 가입 중인 OTT에 영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이 떠서 일단 찜해 두었다가, 큰맘 먹고 주말에 보았다. 가급적 신작이나 영화제 수상작 위주로 보다가, 가끔 n차 감상을 하고 싶은 영화가 있으면 ‘나중에 보기’ 목록에 저장해 둔다. 신작에 밀려 리스트에 잠자고 있다가, 아주 가끔 예전에 재미있게 봤던 영화를 다시 꺼내 보곤 한다. 매번 느끼는 것이지만, 분명 인상 깊게 보았던 영화인데도 몇 장면을 빼놓고는 마치 처음 보는 영화처럼 넋이 빠져 보게 된다.
그런 경험은 영화에서뿐만 아니라 등산을 할 때도 나타난다. 가급적 안 가본 산에 가는 편인데, 어쩌다 예전에 갔던 명산을 다시 찾게 되면 전혀 다른 풍광을 보게 된다. 특히 10년이 넘어가면 생경한 느낌이 더 크게 든다. 비슷한 경험은 책을 읽을 때도 나타난다. 명작을 다시 읽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 스토리 자체가 낯설게 느껴지거나 같은 장면에서도 전혀 다른 감정으로 다가오곤 한다. 마치 어릴 때 대로처럼 느껴졌던 길이, 어른이 되어 가보면 조금 넓은 골목길 정도로 느껴지는 것처럼 말이다.
결국 인간의 기억은 효율을 위해 왜곡되거나 선별되는 것 같다. 고통이 너무 크면 잊게 만들고, 과거의 기억은 좋은 것 위주로 남기며, 위험과 관련된 기억은 강하게 각인시켜 무조건 반사처럼 반응하게 만든다. (뱀을 보면 본능적으로 혐오감이 드는 것처럼.) 제한된 뇌의 용량을 효율적으로 사용하도록 그렇게 진화해 온 셈이다. 예전에 비슷한 내용의 강연을 들은 기억도 난다.
그래서 앞으로는 명작으로 알려진 영화나 책은 n차 관람과 독서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예전보다 더 많은 인생 경험을 쌓은 지금 다시 접하게 되면, 더 깊이 있는 감상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제부터는 명작들을 ‘나중에 보기’ 목록이 아니라, ‘우선 감상’ 목록에 넣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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