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한줄기 빛이 드리워져...
제11 화
학교에서 돌아온 희경은 집안일을 빨리 해놓고 밖에 나가 친구들과 놀려고 몸을 바쁘게 움직였다.
장사를 하시는 어머니를 대신해서 늘 그렇게 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였다.
밖에서 친구들 노는 소리가 희경의 귓가에 들려왔다.
희경은 마음이 급해졌다.
손놀림이 한층 더 빨라진다.
마음은 이미 밖에 나가있다.
친구들은 고무줄놀이가 한창이었다.
노래를 불러가며 폴짝폴짝 잘도 뛴다.
'장난감 기차가 칙칙 떠나간다. 과자와 사탕을 쥐고서 엄마방에 있는 우리 아기한테 갖다 주러 갑니다.'
이 노래를 부르면서 아이들은 모두 신이 나서 어쩔 줄 몰라했다.
고무줄놀이는 더 신나고 재미있었다.
한 발로 고무줄을 밟기도 하고,
고무줄을 넘기도 하면서 무릎 높이에서 머리 위까지 점점 올라가는 스릴이 넘치는 놀이였다.
한참 뛰다 보면 어느새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고 땀범벅이 된다.
아이들은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그렇게 뛰다가 하늘이 붉으스레 노을이 질 때서야 집으로 돌아갔다.
희경은 아직도 고무줄놀이의 여운이 남아 흥얼흥얼 콧노래를 부른다.
노래 장단에 맞춰서 쌀을 씻는다.
곤로불 위에 솥단지를 올려놓고 한시도 눈을 못 떼고 지켜보고 앉아있다.
푸르륵 끓어 넘칠까 봐, 밥물이 자작해질 때까지 지키고 있는 것이다.
까만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또 무엇을 해야 하나 골똘히 생각에 잠긴다.
소녀가장이 따로 없다.
가족들을 생각하는 마음이 남달랐다.
어머니가 하시는 걸 지켜봐 와서 그런 것 같았다.
주인집 아주머니가 전화받으라며 희경아버지를 큰소리로 불렀다.
희경아버지는 무슨 일인가 싶어 한걸음에 달려갔다.
반가운 소식이었다.
전화를 끊고 활짝 웃는다.
한줄기 빛이 드리워져 희망의 싹이 보였다.
먼 친척으로부터 같이 일해 보자고 한 것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생선장사가 너무 힘들고 돈도 얼마 못 벌어서 고민하던 차에 연락이 온 것이다.
희경아버지가 사업하려던 샤시 일이었다.
'이젠 됐다. 이젠 살았다.'싶은 생각에 손으로 무릎을 탁 쳤다.
마음이 울컥하였다.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차올랐다.
그토록 하고 싶었던 일을 다시 할 수 있게 되어 무척 기분이 좋았다.
서광이 비치 듯,
한줄기 빛이 생겼다.
쥐구멍에도 볕 들 날이 있다더니 희경이네가 그 짝이다.
죽으라는 법은 없나 보다.
하루하루 힘겹게 살아가는 희경이 가족에게 희망이 생겼다.
모처럼만에 웃음꽃이 활짝 피었다.
매일매일 조여 오는 생활고에 조금은 숨을 쉴 수 있는 여유가 생긴 것이다.
희경아버지가 그토록 활짝 웃는 게 얼마만인가?
답답했던 가슴이 뻥 뚫렸다.
이제야 살 것 같았다.
숨도 편히 쉴 수 있게 되었다.
가슴 밑바닥에서 몽글몽글 피어오르는 희망과 설렘으로 두근두근 거렸다.
얼굴도 발갛게 상기되었다.
자신의 섣부른 판단으로 가족 모두가 힘겹게 살아온 날들이 그동안 한없이 미안했었다.
홀가분한 마음이 들었다.
희경어머니는 이제 자식들을 굶기지는 안겠다는 생각에 눈시울이 붉어졌다.
남편이 일을 다녀도 행상은 계속할 생각이다.
한 푼이라도 더 벌어야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자식들이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바라보는 시선을 가슴속에 간직한 터라 내 한 몸 희생하리라
다짐하고 또 다짐한다.
희경부모님은 새벽에 생선을 떼오면 팔 것을 제외하고,
상품가치가 떨어지는 것은 가족들 먹이려고 따로 남겨놓았다.
꽃게를 사 오는 날이면,
매콤하게 부글부글 지져서 밥상에 올려놓는다.
게살은 입에 살살 녹고,
국물은 밥을 말아먹으면 게눈 감추듯 밥 한 그릇 뚝딱 먹는다.
오빠영호는 제대로 학교를 못 다녀서 그런지 수업시간에 진도를 따라가기가 버거웠다.
아무리 집중해서 들어도 도통 못 알아들었다.
그렇지만 책을 읽고 또 읽고,
문제를 풀고 또 풀면서 조금씩 적응해 나갔다.
그러면서 차츰 나아졌다.
숙제도 꼬박꼬박 해갔다.
가끔 잘 못 해가는 것도 있었지만 나름 공부에 흥미도 생겼다.
매일 새벽에 신문 배달을 하루도 빠지지 않고 열심히 돌렸다.
다 돌리고 나면 온몸이 땀범벅이 되고 힘이 들었다.
그런데도 포기하지 않았다.
한 푼이 아쉬운 현실에 매일 새벽 뛰고 또 뛰었다.
영호는 나이에 비해 철이 빨리 들었다.
희경은 그런 오빠가 대단해 보였다.
언니희숙은 아침 일찍 나가서 저녁 늦게까지 일을 하고 온다.
시간일을 하면 수당을 주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더 벌려고 그러는 것이다.
그래서 가족들 얼굴을 잠깐 밖에 못 본다.
희숙은 얼굴이 달덩이 같았다.
한창 꽃필 나이다.
얼굴도 하얀 데다 이목구비도 뚜렷하고 예쁘게 생겼다.
퇴근하고 집에 오는 길에 남자들이 뒤를 졸졸 따라오기도 하였다.
그러면 희숙은 어깨에 잔뜩 힘을 주고 고개를 빳빳이 하고 걸었다.
하루도 결근하는 일이 없이 열심히 다니면서 일했다.
힘은 들었지만 사람들이 좋아해 주고 칭찬을 해줘서 신이 났다.
희경부모님은 매일 생선 종류를 바꿔가며 물건을 해왔다.
그날그날 시세에 따라서 이것저것 바꾸었다.
그 덕분에 희경이네도 새로운 반찬이 밥상에 올랐다.
모두들 기쁘고 즐거웠다.
가족들 얼굴이 환하게 빛이 났다.
매일 웃을 일도 많아졌다.
도란도란 이야기 꽃도 폈다.
얼마 만에 이렇게 활짝 웃는 것인가?
가장의 어깨에 드리워진 삶의 무게가 그토록 무거웠건만 적어도 오늘만큼은 짐이
내려진 기분이 들었다.
희경은 평소에 말이 없는 편이다.
꼭 필요한 말 외에는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부모님과는 늘 대화를 나눈다.
부모님도 무슨 일이든 희경에게는 다 얘기하였다.
비가 부슬부슬 내린다.
이집저집에서 부침개를 부치는지 고소한 냄새가 솔솔 풍겨오더니 콧속으로 스멀스멀 들어온다.
희경어머니는 자리에서 일어나 부엌으로 가더니,
부추를 숭덩숭덩 썰고, 밀가루 반죽을 하더니 휘리릭 섞는다.
프라이팬에 기름을 두르고 지글지글 부침개를 뚝딱 부쳐서 식구들에게 먹으라며 내밀었다.
온 가족이 둘러앉았다.
부침개를 입에 넣자 부추향이 입안 가득 퍼졌다.
고소하고 쫀득한 맛에 입이 다물어지질 않았다.
싱글벙글 싱글벙글 여기저기 함박꽃이 피었다.
희경아버지는 직장에서 일하는 내내 기분이 좋았다.
쓱쓱 싹싹 톱질을 하면서도 힘든 줄 모르고 열심히 일했다.
다시없을 기회이기에 차곡차곡 일을 해나갔다.
그동안에 가슴속에 응어리졌던 괴로움을 조금씩 조금씩 그렇게 덜어내고 있었다.
힘들었던 생활고에 찌들어서 귀도 못 펴고 웃음도 잃어버린 채 살아야 했던 지난 순간들이 울컥
차올랐다.
이젠 섣불리 생명줄과 같은 이 끈을 절대로 놓지 않으리라 다짐하고 또 다짐하면서 힘주어
톱질을 해나갔다.
희경어머니는 아침 일찍 생선 다라를 이고 나가서는 밥도 굶은 채,
집들이 즐비한 옆마을 골목골목을 누비며 장사를 했다.
목청껏 소리를 치다 보니 목도 걸걸해지고 목도 말랐다.
그러다 운이 좋으면 물을 얻어 마셨다.
종일 걸어 다니느라 다리도 아프고 허리도 아팠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다가 붉으스레 노을이 지기 시작한다.
그래도 운 좋게 생선을 다 팔았다.
희경어머니는 장사 수단이 좋았다.
붙임성 있는 성격이 한몫했다.
집으로 가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힘겨웠던 하루 해를 뒤로하고 식구들이 있는 둥지를 향해 발걸음을 재촉하였다.
희경과 동생희영은 문 앞에 쪼그리고 앉아서 식구들이 이제오나 저제오나 두 눈을 껌뻑거린다.
오빠영호는 벌써 올 시간이 지났는데 어디서 무얼 하는지 감감무소식이다.
희경은 궁금증이 더해만 갔다.
한산하던 골목이 퇴근시간이 다가오자 북적거린다.
오가는 사람들을 쳐다보면서 식구들 오기만을 기다리는데 아직까지 소식이 없다.
희경과 희영은 지루했다.
오랫동안 쪼그리고 앉았더니 다리에 쥐가 났다.
일어섰다 앉았다를 계속하였다.
다리 저린 것 나으라고 침을 코에다 찍어 발랐다.
소용이 없었다.
다른 집들은 시끌벅적한데 희경이네만 조용하였다.
식구들을 애타게 기다렸다.
희경은 다 된 밥을 그릇에 푸고 뚜껑을 덮어 식지 말라고 이불속으로 넣어 두었다.
밥 하는 것은 희경의 일상이 되었다.
오빠영호가 문을 열고 들어온다.
희경은 반가웠다.
영호는 씨익 웃었다.
하루종일 뭘 했는지 영호의 얼굴이 가무잡잡 그을려 들어왔다.
희경이 물어봐도 빙그레 웃기만 할 뿐 아무 말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