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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 속에서 피어난 꽃 (제14 화)

(소설) 한순간 물거품이 되어버린

by 황윤주

제14 화


희경은 찰랑거리는 물지게를 지고 가파른 언덕길을 올라간다.

키가 작아 땅에 닿을 랑 말랑 아슬아슬한 양동이를 천천히 조심스럽게 지고 간다.

숨도 차고 이마엔 구슬땀이 흘러내렸다.

매일 커다란 항아리에 물을 길어다 놓는 것이 일과가 되었다.

아랫동네 수도집에서 돈을 주고 물을 사다 먹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몇 번을 왔다 갔다 하고 나면 기운이 쭉 빠진다.

그래도 희경은 눈살 한번 찌푸리지 않고 열심히 물을 길러다 놓았다.


남규가 군입대 한지도 여러 달이 지났다.

희숙은 남규가 보고 싶고 그리웠다.

그럴 때면 숨죽이고 훌쩍였다.

밤마다 사무치게 그리울 때면 창문에 드리워진 달빛을 바라보면서 밤이 늦도록

몸을 이리저리 뒤척이며 밤잠을 설쳤다.

남규가 가고 희숙은 아기를 가진 걸 알았다.

헛구역질이 나고 속이 메스꺼웠다.

자꾸 먹고 싶은 것이 생겼다.

희숙은 기뻐할 일이었지만 남규가 제대할 때까지 혼자 낳아 길러야 하기에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었다.

가끔씩 슬펐다.

그러나 가족들은 기쁘고 좋았다.

새 생명을 가진 희숙을 축하해 주었다.


희경이네 구멍가게는 장사가 제법 잘 되었다.

희경어머니 솜씨가 좋아서 핫도그 반죽과 풀빵 반죽을 직접 해서 팔았기 때문에 한 번

사 먹어본 사람들은 계속 사 먹었다.

차츰 단골도 생겼다.

희경이는 학교에서 돌아오면 어머니를 도와서 가게를 보았다.

희숙도 간간히 같이 보았다.

희경은 핫도그를 만들고, 풀빵을 직접 구워서 팔기도 했다.

가게 규모는 작았지만 장사가 잘되어 실속이 있었다.

생활에도 많이 도움이 되어서 한숨을 쉬는 것도 차츰 줄어들었다.

희경아버지는 일을 다니면서 활기를 되찾아갔다.

삶에 대한 의욕도 생기고 보람도 느꼈다.

무엇 보다 가족들의 생활이 안정되어 가는 것이 기뻤다.

이웃들과도 친하게 지내다 보니 즐거움도 커져갔다.


희경어머니는 가끔 동네에 조그만 마른오징어 가공 식품 공장에 가서 일을 하고 돈을 벌었다.

가족끼리 하는 소규모 공장이라 친밀감이 높았다.

점점 서로 신뢰감도 쌓여가고 속얘기도 할 만큼 가깝게 지냈다.

특히 사모님과는 더 돈독한 사이가 되었다.

동네 사람들도 자주 왕래를 하면서 친하게 지내게 되었고 그분을 좋아하고 잘 따랐다.

어느 날 사모님이 계 오야가 되어서 계 할 사람들을 모으고 있었다.

희경어머니를 비롯해서 동네 사람들도 꽤 여러 명 계를 들었다.

희경어머니는 목돈을 타서 집안살림에 보탬이 되고 싶었다.

한 달 한 달 곗돈을 부으면서 기대감과 설렘으로 한껏 부풀어 올랐다.

콧노래도 부를 만큼 신이 났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났다.


어느 날 동네가 발칵 뒤집혔다.

사람들이 모여서 웅성웅성 야단이었다.

영문을 모르는 희경어머니는 무슨 일인가 싶어 기웃거렸다.

계 오야였던 사모님 식구가 모두 야반도주를 했다고 한다.

계원들 돈을 다 떼어먹고 소리소문 없이 도망을 가고 없었다.

감쪽같았다.

희경어머니는 얼굴이 창백해져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듣고 파르르 떨었다.

한가닥 희망을 품고 열심히 살았는데 적잖은 돈을 날린 셈이다.

제대로 먹지도, 입지도 않고 곗돈을 부었는데 송두리째 날려버렸다.

허탈하였다.

너무 기가 막혀 말문이 막혔다.

눈물도 안 나왔다.

억장이 무너져 내렸다.

왜 이런 일이 우리한테 닥쳤는지 한탄을 하였다,

동네 사람들도 땅을 치며 울고불고 난리가 났다.

다들 어려운 형편에 목돈 좀 만들어 보려고 든 계였다.

도무지 믿을 수가 없다고들 하였다.

착한 사람들 같아서 믿고 계를 들었는데 어떻게 이럴 수가 있냐며 믿는 도끼에 발등 찍혔다고

저마다 한소리씩 하였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더니 그 말이 딱 맞다며 가슴을 쳤다.

희경어머니의 꿈이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희경은 시름에 빠진 어머니를 바라보며 아무런 말을 할 수가 없었다.

희경아버지도 마찬가지로 그저 말없이 바라 볼뿐이었다.

희경어머니는 몇 날 며칠 속을 끓이며 가슴앓이를 하였다.

자다가도 벌떡벌떡 일어나 앉아서

"내 피 같은 돈, 내가 미쳤지"넋두리하며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한편 희숙의 배는 점점 불러왔다.

가끔씩 태동을 느꼈다.

아이가 잘 노는지 배가 이리 불룩 저리 불룩 춤을 추었다.

희숙은 엄마가 되어가는 과정이 신기했다.

배가 불러올수록 남규에 대한 그리움이 커져만 갔다.

보고 싶었다.

가끔 남규로부터 보내온 편지가 그나마 외로움과 그리움을 달래주었다.


최전방에서 군복무 중인 남규도 희숙이 보고 싶고 그리웠다.

아무도 면회를 가보지 못하였다.

근무 경계가 삼엄한 곳이라 잠시도 한눈을 팔아서도, 딴생각을 해서도 안 된다.

한순간도 긴장의 끈을 놓을 수가 없다.


겨울이라 찬바람이 매섭게 분다.

기온이 뚝뚝 떨어지는 탓에 사람들은 종종걸음으로 서둘러 집으로 향했다.

살을 에는 듯한 찬바람에 사람들은 옷깃을 꽁꽁 여민다.

털모자, 털장갑에 털목도리까지 칭칭 감았지만 추운 날씨를 이기기엔 부족하였다.


들녘에 있는 논에 누가 물을 대놓았는지 꽁꽁 얼어 빙판이 되었다.

만국기가 바람에 펄럭이며 나부끼고 있었다.

스케이트, 썰매장이 생겼다.


오빠영호는 나무판자로 썰매를 만들었다.

솜씨가 좋은지 그럴싸하게 만들어졌다.

썰매 막대기도 두 개 만들었다.

동생희경에게 썰매 타러 가자고 하였다.

희경은 룰루랄라 신이 났다.


썰매장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스케이트 타는 사람, 썰매 타는 사람, 그냥 미끄럼 타는 사람들로 만원을 이뤘다.

영호는 스케이트를 타고 싶어 돈을 주고 빌렸다.

희경은 썰매에 앉아서 막대기로 콕콕 찍어가며 천천히 출발을 하였다.

처음 타는 썰매라 잘 나가지 않았다.

몇 번 반복한 끝에 썰매가 스르륵스르륵 미끄러져 갔다.

즐겁고 신이 났다.

영호는 스케이트를 언제 타봤던 사람처럼 씽씽 달렸다.

허리를 구부린 채 팔을 휘저으며 날렵하게 빙판 위를 지쳐나갔다.

희경은 그런 오빠가 신기하고 부러웠다.

날씨가 추운 데다 칼바람이 불어서인지 사람들 볼이 어느새 빨갛게 변했다.


희경은 어엿한 중학생이 되었다.

희경어머니가 머리를 단발로 단정히 잘라주었다.

새로운 환경에서 새롭게 시작하는 학교 생활이 즐거웠다.

친구들도 새로 사귀어 제법 잘 어울렸다.

점심시간이 되면 뒤돌아 앉아 도란도란 얘기 나누며 밥을 먹었다.

쉬는 시간이면 팝송을 유난히 좋아하는 친구덕에 팝송을 배웠다.

드라마나 영화를 좋아하는 친구가 전날 본 것을 실감 나게 얘기를 해주면 두 귀를 쫑긋

세우고 집중해서 들었다.

희경은 그런 문화를 접할 기회가 없어서 신기하고 재미있었다.


희경과 오빠영호는 학교가 같은 방향이라 매일 등교할 때 같은 버스를 탔다.

버스는 아침 시간엔 스쿨버스처럼 학생들로 가득 찬다.

하루는 나란히 손잡이를 잡고 가던 영호가 다른 아이들이 쳐다볼 걸 의식해서인지

새끼손가락으로 희경의 손등을 살짝 툭툭 쳤다.

희경이 고개를 돌려 쳐다보자 주머니에서 회수권 몇 장을 꺼내 희경에게 건넨다.

희경은 얼른 받아서 손에 쥐었다.

그리고는 소리 없이 입모양만 "고마워 오빠"하였다.

만원 버스는 차가 흔들릴 때마다 이리 쏠리고 저리 쏠리고 요동을 쳤다.

그럴 때면 학생들이 꺄악~~~ 소리를 지른다.

영호의 학교는 희경의 학교보다 조금 더 멀어서 희경이 내리고 난 후 더 가야 한다.

희경의 학교 앞에서 여학생들이 우르르 내린다.

희경도 오빠에게 눈인사를 하고 재빨리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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