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귀한 손님
제16 화
드높은 가을 하늘이 파랗게 펼쳐있다.
따사로운 햇살 가득 내리쬐는 가을 들녘엔 벼가 익어 고개 숙인 채 노랗게 물들어 있다.
밀짚모자를 눌러쓴 허수아비가 팔을 휘저으며 한가로이 새들을 쫓고 있다.
길옆으로 코스모스가 곱게 피어 바람결 따라 한들거린다.
희경은 옆집에 사는 영순이와 매일 학교를 오고 간다.
영순이는 말수가 적은 편이다.
희경이와는 서로 터놓고 얘기할 만큼 다정하고 착한 여학생이다.
단발머리 곱게 빗어 차분하고 단정한 차림에 곱상한 얼굴을 하였다.
영순이와는 서로 자주 왕래를 하고 살았다.
집에 놀러 오라 하여 갔더니 영순이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얼마 안 되어 방 한쪽에 상청이 마련되어 있었다.
영순이는 희경을 오라 해놓고 아무 말이 없었다.
희경이도 아무 말하지 않고 물끄러미 영순이를 바라보고 한참을 앉아있었다.
그날은 그렇게 조용히 영순이 곁에 앉아있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희경의 집에 귀한 손님이 오셨다.
외사촌언니와 형부가 찾아왔다.
형부는 미국 사람이었다.
국제결혼을 하고 미국으로 들어가기 전에 고모인 희경어머니를 만나기 위해 온 것이었다.
희경은 왠지 모르게 마음이 들떠있었다.
처음 보는 외국 사람이라 신기했는데, 거기다가 형부라니 믿어지지가 않았다.
그래서 몇 번씩 힐끔거리며 보고 또 보고 하였다.
형부는 훤칠한 키에 코도 오똑하고 눈도 커다란 미남이었다.
언니도 긴 파마머리에 이쁘게 생겼다.
미인이었다.
희경언니와 형부는 낯선 기색 하나 없이 편안하게 말을 하였다.
가족들도 거리낌 없이 서로 대화를 주고받았다.
희경형부는 한국말을 더듬거리며 언니의 도움을 받아 가족들과 소통을 이어갔다.
선물도 이것저것 많이 가져왔다.
처음 보는 물건들도 있었다.
그중에 고풍스러운 그림이 그려진 커피잔이 예뻤다.
전기스토브도 처음 보는 것이었다.
맛있는 과자와 홍차도 있었다.
희경언니는 홍차를 우려 찻잔에 담고 어떻게 마시는지 알려주었다.
처음 마셔보는 거라 신기했다.
희경의 부모님과 술도 한 잔씩 주고받으며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나눴다.
희경형부는 경찰이라 했다.
미국에 계신 부모님과 같이 살기 위해 들어가는 것이라 하였다.
사촌언니는 자신이 끼고 있던 반지를 하나 빼서 희경어머니 손가락에 끼워주었다.
보고 싶을 때 반지를 보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희경어머니 형제들은 위로 언니 한 분만 빼고 모두 돌아가셨다.
사촌언니는 외삼촌 딸이었다.
혈육이라고는 조카들 몇 명뿐이라 애정이 남달랐다.
어두워지기 전에 가야 한다며 사촌언니와 형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희경어머니는 아쉬운 마음에 눈물을 흘렸다.
앞으로 좀처럼 보기 힘들겠다며 작별을 아쉬워했다.
한국에 나오게 되면 꼭 다시 오겠다고 약속을 하고 떠났다.
사촌언니도 몇 번씩 뒤돌아보고 또 돌아보며 점점 멀어져 갔다.
희경은 가게를 보느라 바빴다.
핫도그와 풀빵을 구워가며 파느라 쉴 새가 없었다.
동네에 가게가 많지 않아 구멍가게인데도 제법 장사가 잘 되었다.
희숙은 아들을 보느라 가게는 잠깐잠깐 봐주었다.
아기는 가끔씩 생글생글 미소를 지으며 까르르까르르 소리를 냈다.
아기는 하루가 다르게 무럭무럭 자랐다.
얼굴도 뽀얗게 살이 올라 포동포동하게 보기 좋았다.
며칠 있으면 추석이다.
사람들은 장을 보느라 분주하게 지냈다.
희경이네 가게도 추석 대목에 팔 물건들을 가득 채웠다.
종합선물세트를 비롯해 과자, 과일을 진열해 놓았다.
희경어머니는 시장에서 아이들이 입을 옷과 신발을 사 오셨다.
희경은 너무 좋아서 잠을 잘 때도 새 옷과 새 신발을 머리맡에 놓고 한 번씩 쳐다보고 잠이 들었다.
희경이 학교에서 돌아오니 형부남규가 와 있었다.
반가웠다.
휴가를 나왔다고 했다.
가족들 모두 기뻐서 어쩔 줄 몰라하고 있었다.
희숙은 울었는지 촉촉이 젖은 눈이 빨갛게 충혈이 되어 있었다.
남규는 누워서 옹알거리는 아기가 자신의 아들이란 게 실감 나지 않은지 물끄러미 바라보고 서 있다.
그리고 이내 아기를 안았다.
아기는 마치 뭐라도 아는 듯 입을 벙끗거리며 웃어 보였다.
남규는 "까꿍, 까꿍"아기를 얼렀다.
희숙은 그런 남규를 바라보며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추석날 아침이다.
온 동네가 시끌벅적하였다.
희경이네도 즐거운 소리로 까르르 거렸다.
달그락달그락 젓가락 소리가 웃음소리와 함께 장단을 맞췄다.
남규도 모처럼 먹는 집밥이 맛있었다.
최전방에서 보초 서느라 사람 구경을 할 수가 없다고 하였다.
그래서 집 생각도 더 나고, 더 외롭고 쓸쓸하였다고 한다.
가족들이 다 모이니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얼마 만에 가져보는 행복인가?
희숙은 꿈만 같았다.
'이 꿈이 깨지지 않았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하였다.
남규는 장인어른과 술도 한잔 하였다.
주거니 받거니 이야기꽃을 피웠다.
오빠영호는 모처럼 식구들과 오래 얼굴을 마주했다.
그동안 뭘 하고 다녔는지 희경이 꼬치꼬치 캐물었다.
영호는 막상 신문 배달을 그만두고 나니 용돈이 아쉬워 구두닦이를 했었다고 한다.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고 한다.
회사원들을 찾아다녀야 해서 더 고단한 하루였다고 하였다.
이제는 그만두고 공부에 전념할 거라고도 하였다.
남규의 꿈만 같았던 휴가가 끝났다.
내일이면 복귀해야 한다.
또다시 희숙과 잠시 이별을 해야만 한다.
둘은 밤이 늦도록 잠을 못 들고 아쉬움을 달래었다.
남규는 희숙과 포옹을 끝으로 아쉬운 발걸음을 재촉하였다.
희숙은 남규가 처음 입대할 때와 달리 조금은 덜 섭섭하였다.
희숙의 곁에 아들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달력에 하루하루 지날 때마다 X자를 표시하였다.
그렇게 남규가 제대할 날을 세어가고 있었다.
희경은 가족들을 바라보며 흐뭇해하였다.
밤이면 밤마다 하늘을 올려다보고 반짝이는 별을 세어보기도 하고, 북두칠성을 찾아보기도 하였다.
그러면서 꿈도 키워갔다.
꿈 많은 여학생이 되어 조금씩 조금씩 성숙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