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알 수 없는 내 생의 일부

by 여름

언젠가 아이가 아주 어렸을 때 이 시간이 빨리 지나가길 바라던 적이 있다. 빨리 커라. 빨리 커라. 마치 주문을 외듯 아이의 등을 두드리는 손 박자에 맞춰 홀로 중얼거리던 밤 들. 누가 내 기도를 들어주기라도 했는지 일 년이 마치 한 달처럼 지나갔다. 누워만 있던 아이가 기고, 서고, 걷고, 뛰며 때에 맞는 모습으로 나타났다 사라졌다. 더는 뛰고 걷는 게 특별한 일이 아니게 되었을 무렵, 잠옷을 갈아입히려 상의에 아이의 머리를 집어넣는 순간 나는 내 주문이 잘 못 되었음을 느꼈다. 잠깐 멈칫하는 내 모습에 스스로 팔을 집어넣던 아이가 ‘엄마 왜 그래?’하고 물었다. 매일 보던 얼굴이 낯설게 느껴졌다. 언제 이렇게 컸을까. 나는 옷을 입히다 말고 아이를 냅다 품에 안았다.


“왜 이렇게 빨리 컸어? 조금만 천천히 크지.”


내게서 몸을 떼고 눈을 바라보며 아이가 말했다.


“나 밥 많이 먹어서 이만큼 큰 거지. 엄마가 밥 많이 먹으라며.”

“그러게. 엄마가 말을 잘 못 했네.”


빨리 크란 말은 하지 말걸. 아이가 제 속도에 맞춰 부지런히 크고 자라던 모습들을 매일 밤 핸드폰 속 사진으로 다시 꺼내 보았다. 사진 속에 아이는 팔다리를 버둥거리며 울고, 엎드린 채 고개를 세우며 웃고, 양 엄지를 볼에 대고 메롱 하며 카메라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주 어린 내 아이와 지금보다 조금 젊은 내가 회전목마를 함께 타고 있기도 했고, 생일 초를 부는 아이를 바라보며 웃고 있기도 했다. 할 수만 있다면 아이의 유년 시절을 통째로 어딘가에 보관해두고 싶었다. 굴러가는 모습대로 빛이 반사되는 투명한 유리구슬들이 사방으로 퍼지는 모습을 그저 넋 놓고 바라보는 기분이었다. 그것들이 너무 아름다워서 얼른 주머니에 넣고 싶지만 굴러가는 속도가 너무 빨라 그저 바라보는 것이 최선인 기분.


어렸을 적 나는 가끔 옷장 깊은 곳에 누워있는 두꺼운 앨범을 꺼내 보곤 했다. 배를 깔고 엎드린 자세로 긴 글씨가 쓰여있는 동화책을 보듯 사진 한 장, 한 장을 깊이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그렇게 한참 사진을 보고 있으면 할머니는 아빠가 날 얼마나 사랑했는지 이야기해 주셨다.


“첫애라고 얼마나 애지중지했는지.”


할머니의 말에 어린 나는 고개만 끄덕였다. 할머니가 말한 그 사랑의 크기가 어느 정도인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아빠와 함께 찍은 사진 속 나는 아빠 품에 안겨 희로애락을 모르는 아기의 표정을 하고 있었고, 아빠는 잔디밭에 앉아 내리쬐는 햇볕에 인상을 구긴 채 카메라를 응시하고 있었다. 아빠가 내 볼에 입 맞추거나, 환하게 웃으며 손가락으로 V자를 하고 있었다면 할머니가 말했던 사랑의 실체를 좀 찾아볼 수 있지 않았을까. 아쉽게도 아빠와 함께 찍은 사진은 그것이 전부였기에 아빠의 사랑을 그저 짐작할 수밖에 없었다. 마흔에 가까운 늦은 나이에 품에 안았을 어린 자식이 참 예뻤겠지. 하면서.


내가 태어나기 전, 막내 고모 졸업식에 참석한 엄마의 사진도 있었다. 정신없는 졸업식 날처럼 사진 속 풍경도 퍽 요란스러웠다. 사진 속엔 고모와 할머니, 엄마가 함께 찍혀 있었지만 찍는 사람이 셔터를 잘 못 눌렀는지, 카메라를 제대로 쳐다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사촌 고모 결혼식 날에 찍은 사진 속엔 흰 드레스를 입은 고모의 옆에 남자 한복을 입은 네다섯 살로 보이는 내가 서 있었다. 사진 속 빠글빠글한 파마머리를 한 내 모습이 너무 우스워 이 사진을 볼 때면 나는 깔깔 웃곤 했다. 지금은 웃고 있지만, 이 머리를 했던 날엔 많이 울었겠지. 둘리 만화 속 마이콜 머리를 한 나와 붉은 두루마기를 입은 엄마가 사진 속에선 손을 꼭 붙잡고 서 있었다.


인생은 자신 스스로 만들어 가는 것이라고 하지만 자신조차 어쩔 도리가 없는 생의 일부가 있다. 온전히 부모에게 맡겨진 내 삶의 일부. 어느 한 곳 상처 나거나 모난 데 없는 가장 유약한 시절. 생의 모든 성장을 응축시켜 놓은 그 시절 속의 나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부모의 눈으로만 볼 수 있는 나의 유년 시절을 보듯 아이의 사진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아기인 내가 울 때 어떤 표정으로 우는지, 웃을 땐 눈이 얼마만큼 작아졌는지 생일 초를 부는 입술의 모양이나 동그란 복 코는 어려서부터 이렇게 생겼었는지 물어볼 사람도, 바라볼 사진도 없어 한참을 아이의 사진을 서성거렸다. 살아가며 나는 절대 알 수 없는 나의 어린 시절 모습을 내 아이의 사진을 통해 그저 그러했겠거니. 또 짐작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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