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그냥 레모네이드가 마시고 싶었어요
늦은 밤, 갑자기 순대가 먹고 싶었다. 집 앞 분식집을 지나가다가 사장님 손에 숭덩숭덩 썰리는 순대를 스치듯 본 것뿐이었는데, 종일 순대가 머릿속에서 빙빙 돌았다. 요즘 비도 오니까 순댓국을 먹는 게 좋겠다 싶어 집 근처 순댓국 맛집을 찾았다. 사진 속에 김이 나는 순댓국을 보고 나니, 뜨끈한 국물을 한 입 먹은 사람처럼 침이 꼴깍 넘어갔다.
순댓국 사진을 캡처해서 글을 쓰고 인스타그램 스토리에 올렸다.
-머릿속에 하루 종일 순대 생각..! 내일은 순댓국 먹으러 가야지.
포크와 나이프를 들고 춤추는 토끼 스티커까지 붙여 업로드하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치약을 짜서 칫솔을 입에 물었는데, 지인에게 DM이 왔다. 자주 대화하던 상대가 아니었던지라 무슨 일인가 싶어 바로 확인했다.
‘어머!... 혹시... 셋째?ㅎㅎ’
컥. 입에 물고 있던 칫솔을 뱉어냈다. 내가 뭘 본거지? 셋째? 느닷없는 셋째 발언에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그냥 화면을 꺼 버렸다. 상대방 역시 진심이 아닐 테고 웃자고 보낸 DM이었겠지만, 어쩐지 웃음은 하나도 나오지 않았다.
요즘은 임신했냐는 말이 실례이기도 하고, 자칫 성희롱 발언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조심하는 분위기지만, 내가 막 결혼했던 10년 전엔 ‘혹시.. 임신?’이라는 말을 수도 없이 들었다.
아이가 없던 신혼 초, 회사에서 속이 안 좋아 점심을 거르고 소화제를 먹으려는데, 옆자리에 앉은 동료가 내 손목을 잡았다. 갑작스러운 그녀의 행동에 회사에 무슨 큰일이라도 났나 싶었다. 그녀는 주변의 눈치를 보며 자세를 푹 숙이더니 비밀 이야기를 하려는 듯 가까이 다가와 속삭였다.
“혹시 모르니까 테스트기 해 보고 약 먹어.”
단박에 말뜻을 이해하고는 나는 하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에이, 아니에요.”
내 웃음에도 그녀는 정색하며 말을 덧붙였다.
“아니야. 그래도 모르잖아.”
‘허허.. 모르다니요. 제 몸인데요...?’그 말이 입안에 맴돌았지만, 꾹 참았다. 그녀는 무슨 대단한 태몽이라도 꾼 사람처럼 진지했다. 그녀의 단호한 말투에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저기.. 대리님... 저.. 어제.. 생리 끝났어요...”
내 말에 “아, 그래?”하며 멋쩍게 웃던 그녀. 역시, 태몽의 주인공은 얘가 아닌가. 하는 얼굴이었다.
“아니, 나는 또 혹시나 싶어서.”
그녀는 그 말을 남긴 채 의자를 끌며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소화가 좀 안 된다고 하거나, 카페에서 레모네이드처럼 신 음료를 시키면 사람들은 삼신할미의 부하들 마냥 음흉한 눈빛으로 “어? 뭐야~ 혹시... 임신한 거 아냐?” 하고 물었다. 처음엔 하하, 웃으며 “아니야” 하고 넘겼는데, 그게 계속되다 보니 ‘아니라니까 아!!!’하고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그래서 나중엔 속이 안 좋거나, 먹고 싶은 게 있어도 입을 다물었다.
정말 궁금해서 물어보는 것일 수도 있고, 임신이 아닌 줄 알지만 그냥 말을 꺼낸 것일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혹시 임신 아니냐’는 말을 들으면 난 급격히 기분이 다운되었다. 그냥 속이 안 좋을 뿐이고, 단지 상큼한 음식이 먹고 싶었던 것인데 임신 가능성이 있는 여자란 이유만으로 내 몸의 증상이‘임신 증상’으로 치부되는 게 싫었다. 어디 그뿐일까, 임신과 출산이 쉬운 것도 아니고 인생이 바뀌는 중요한 사건이나 다름없는데, 그걸 농담처럼 가볍게 여기는 것도 맘에 들지 않았다. 너 좀 예민하다- 소리를 들을지라도, 싫은 건 어쩔 수 없다.
이젠 먹고 싶은 음식 사진을 올릴 때 주석처럼 설명을 달아야 하는 건 아닌가 싶다.
- 너~무 먹고 싶었던 마카롱! 드디어 영접. *생리 그저께 끝남. 임신 아님.
- 속이 안 좋아 병원행 *남편과 섹스 안 함. 임신 아님.
내 TMI 남발로 당황한 지인들의 표정을 상상하며 속으로 웃었다.
천천히 이를 닦고 세면대에 치약 거품을 뱉었다. 다시 핸드폰을 화면을 켜 답장을 적었다.
‘그저께 생리 끝남 ^^ 임신 아님. 앞으로 임신할 일 없으니 이런 말 금지!’
입안에 상쾌한 치약 냄새가 남았지만, 마음 한구석은 여전히 텁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