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에 관한 단상
나에게 여행이란 일상으로부터의 잠시 쉬어가는 탈출구다.
좀처럼 현실에서는 쉴 수 없을 때가 있다. 이때는 발걸음을 내 세상 밖으로 돌려야 숨을 쉬게 된다.
드라마 도깨비에서 도깨비가 들락날락하는 캐나다 밴쿠버처럼, 나에게 여행은 현실을 잊는 그런 곳이어야 했다. 타임머신 캡슐 같은 이 여행에는 몇 가지 조건이 있다.
첫째, 비행시간이 짧아 금요일 퇴근길에 나서도 도착시간이 부담이 안될 것
둘째, 일상적인 집(아파트면 더 좋다), 나만의 거처가 있을 것
셋째, 침대에 누우면 정면에 놓인 텔레비전
평소 텔레비전을 보지 않기 때문에 밀린 프로그램들을 여행지에서 보는 것이 벌써 9년째 습관이 됐다. 여행중에는 딱히 계획이나 기한이라는 게 없어 게을러져도 되는 프리패스를 손에 쥔셈이다! 사람들은 일상에서 벗어나기 위해 텔레비전을 보지만, 여행 중 드라마 정주행은 그야말로 여행 X드라마가 배가돼 현실을 잊게 해준다. 특별히 '별에서 온 그대' 시리즈는 일본에서 밤낮으로 본 기억이 난다.
운좋게도 30대에는 위 요건을 갖춘 여행지가 두 곳이 있었다. 일본과 제주도이다. 두 곳 모두 섬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하긴 비행기를 타야만 하는 곳과는 바다가 있으니, 출발지도 도착지도 결국엔 각각의 섬이겠다.
일상에서 방문한 두 곳에서의 나는 다른 사람인 것만 같았다. 도착할 무렵에는 하얀 모래 사변이 비행기 창 밖으로 펼쳐졌다.
비행기 안에서는 멍때리거나 잠을 청하지 못하기에 일기를 쓰는 버릇이 생겼다. 덕분에 당시의 기분과 머릿속 생각들을 좇아 다니게 됐다.
여행이 끝날 무렵에는 이것이 마지막 비행이겠구나 할 때가 있다. 두 곳 모두 그런 기분이 들었다. 인생에는 항상 시작과 끝이 있다고 하는데, 내겐 일상적 여행지가 그랬다. 마치 사랑이 끝나겠구나 하는 예감처럼 말이다.
@ 여러 번 찾아갔던 금오름, 이 날은 밑바닥을 훤히 드러내고 있었다. 쾌청했고 바람 또한 제주스러웠다.
그런데, 여행의 마지막 날이 달랐다
이날의 여행은 마지막 날도 너무나 충만한 에너지로 가득 차 이상스러울 정도였다. 아침에는 만족스러운 조식을 먹고나 미적대면서 숙소를 떠났지만, 오설록에 가서 스탬프를 한참 찍어대거나 녹차밭에도 두어 번 들락날락거렸다.
10분 정도 드라이브를 하다보면, 오른쪽에 금오름이 있다. 이날 따라 유난히 가축 분뇨 냄새가 진동했지만, 올라갈 수록 눈앞에 펼쳐진 푸르딩딩한 제주의 밭은 평온하기만 하다. 높은 기온(26도) 탓인지 등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히기도 했다. 11월 중순인데도 아침에 한라산 영실코스를 등반했더라면 큰일 날 정도로 더운 날씨였다.
이윽고 이번 여행에서 두 번째로 협재에 갔다. 자주 가는 고기 국숫집의 고명이 달라졌다. 이를 아는 척 하니 주인 여자 사장님은 우리에게 "그렇지요? 어떻게 기억해요? 전복도 커졌어!!"라고 하신다. 암튼 이 집 국수는 기가 막힌다. 면을 그닥 좋아하지 않는 내게도 이 집 고기국수는 참 맛있다. 김치도 무조건 리필해서 먹을 정도이다.
협재해변에서 앉아 있노라면 제주도로 들어오는 비행기가 유난히 잘 보인다. 어디 항공 인지도 보여서 제주로 들어오는 일행이 탄 것인지도 쉽게 맞힐 수 있을 정도이다. 아무튼 협재 바닷가를 한참 누리고도 에너지가 남아 돌아서 제주 면세점까지 도착했으니, 정말 신기한 여행의 마지막 날이었다.
대게는 9호선을 타고 집으로 돌아올 때, "그래도 서울이 좋지!" 하는데 전혀 그런 기분이 안 들다니 신기했다. 스스로의 감정에도 이유를 찾는 것은 직업병이요, 성격상 특성이지만, 그냥 좋았던 것이랴. 그리고 마지막에 갈수록 더 좋은 사람, 더 좋아지는 인생이어라 싶은 마음이다. 내 일상적 여행지의 여행과 같이 말이다.
@ 오랜만에 출근 전 붓질을 휘리릭해봤다. 사진이 훨 더 낫긴 하지만, 아 하늘 높이 보이는 것은 송전탑? 송신탑?
@오설록 이니스프리, 추억을 꾹꾹 눌러 스탬프를 찍을때 참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