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세일즈 업에 뛰어든 때는 29살 하고도 10개월이 되던 날이니 우리 나이로 30에 가까운 시기였다. 바로 나와 동시대에 태어난 4년제 대졸 친구들이 전문직으로나 사회생활을 시작할 때이다. 보통 세일즈, 즉 판매영업직종은 정규 교육과정을 졸업한 직후, 혹은 학교를 바로 졸업하고 군대를 다녀와 제대 후인 20대 초중반에 시작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나는 이렇게나 늦게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당시 어린 신입사원을 기다린 선배들에게 나의 존재는 그리 달갑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판매영업직은 다른 일들에 비하면 나이가 중요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중에 시간이 지나 내가 전국에서 전자제품 분야에서 1등을 여러번 차지하고 나온 시점에도 여전히 그곳에 남은 분들이 많으니.(물론 그분들은 저마다의 사정이 있고, 그 일을 좋아하거나 천직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늦었지만 나는 세일즈 업종에서 최고 매출을 찍고 다졌다. 그래, 시작 시기도 좋지만 졸업장을 언제 받느냐도 꽤 중요한 일이다.
세일즈 업종에는 딱히 직급체계가 없다. 세일즈맨의 상대방은 소비력을 갖고 있는 다양한 연령대에 걸친 고객이다. 그래서 30대 이상의 판매자라도 몇 가지 요소를 갖춘다면 더 유리한 점이 있다. 나처럼 20대를 훌쩍 넘긴 후배들이 나이에 관한 걱정거리를 늘어놓을 때마다, ‘지금부터 하면 된다.’라고 말한다. 단언컨대 나의 경험상 세일즈에서 만큼은 결코 늦은 나이란 없으니.
나는 서른두 살에 신용불량자였다. 즉 그 말은 ‘내 이름 석 자로 통장을 만들 수 없고, 내 이름으로 신용카드나 휴대폰마저 만들 수 없는 상태’라는 것이다. 당시 나의 사회·경제적 상태는 그야말로 무능력자였다. 이런 상황은 나조차도 진부하게 느껴지는 수많은 자기계발서의 자수성가한 이야기이자, 흔하디 흔한 가난하고 불우한 젊은 시절의 이야기일 수 있다. 그럼에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나는 사회 초년생으로서 첫발을 떼기도 전에 부모님의 사업이 망할 대로 망한 상태였다.
당시 나는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부모님의 사업체 명의를 내 이름으로 변경했어야 했고, 그렇게 해서 겨우 7년간 사업을 우격다짐 끝에 버티긴 했지만, 결국 부모님의 사업은 또 망해서 나는 신용불량자가 됐다. 무엇보다 휴대폰을 개통하지도 못하는 상황이 생긴 것이 불편했다. 지금도 기억하는 것은 고등학교 친구인 준형의 명의를 10년 동안 빌려 그로부터 서른두 살까지 그의 이름으로 살게 된 것이다. 고맙게도 준형이는 내 이름으로 휴대폰을 만들 수 있을 때까지 내게 신분증, 아니 신분을 빌려주고 기다려주었다. 다만 아직도 기억나리만큼 씁쓸하게도 당시 114에 전화해 휴대폰에 등록된 사항을 변경할 때마다 내 이름과 내 주민번호 대신 친구의 이름과 외운 주민번호가 지우개처럼 나를 지우기라도 할 것 만 같았다. 당시 나는 쓸 일리 없던나의 진짜 주민번호가 가물가물했다. 지금에도 친구의 주민번호는 잊히지 않는다.
이런 사정이다 보니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다 뒤늦게 입대를 했다. 입대후 부모님과 여동생이 함께 살던 집에는 내가 머무를 방이 없었다. 그나마도 가족들이 투룸을 잡아 살 무렵 두 평 남짓한 거실에서 잠을 청하는 날이면, 크지도 않은 내 키에도 두 발이 신발장 센서에 딱 걸려 밤새 신발장 불이 켜졌다 꺼졌다를 반복했다.
제대후에도 사정은 다를 게 없었다. 고향에서의 삶은 답답했고 그 답답함을 이겨내지 못하던 어느 아침 일찍 무작정 수원에 있는 친구를 찾아 나서게 됐다. 친구 역시 반지하 방에 살고 있었지만 기꺼이 와있어도 좋다며 나를 반겨주었다 . 염치가 없었지만 한동안 전기세 정도만 내고서 머무를 수 있었다.
당시 내가 머물던 수원의 친구 집에서 나는 어느 날, ‘판매’를 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불현듯 머리를 스쳤다. 이후 나는 친구 집 근처의 하이마트에 지원해 운 좋게 일할 기회를 얻었다. 사실 처음에 지원했던 부분은 삼성전자 디지털 플라자 부문이었는데, 면접관이 하이마트로 배정해 준 것이었다. 자원해서 지원한 곳이 아니라 아쉬움이 있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전기제품 분야의 전 브랜드가 입점된 곳이었고, 군소 소매직 직원들이 치열하게 경쟁하는 분위기에서 판매영업직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이곳이 나의 첫 직장이 되었다. 그때 내 나이는 서른이었고, 수중에 500만 원을 모을 수 있었다. 나는 그제야 혼자 머무를 수 있는 원룸이란 곳을 얻었다. 작은 공간이었지만, 그때부터가 진짜 인생에 시작이었다. 누구 옆에 기생하는 것이 아니라 혼자 생활하고 일하면서, 나만의 기준과 습관을 세우고 하나씩 이뤄나가는 공간을 갖게 됐고 그것이 나의 성공스토리의 기반이 됐다.
이런 이야기로부터 나는 30대 초반에도 세일즈로 직장생활을 시작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래도 요즘은 보통은 본인 명의 휴대폰 정도는 가지고 있지 않는가. 그때부터 2년 즈음 일하니 카드사에서도 한도 100만 원짜리 카드를 만들어주고, 내 명의로 된 휴대폰을 개통할 수 있었다. 당시는 신용카드 발급에 심사 기준이 나름 까다로웠다. 나의 경우 모든 카드사에서 거절당했지만, 삼성카드에서만 해준 것이라 아직도 내 신용이 완전히 회복된 상태는 아니었다. 그렇게 늦깎이로, 누구의 재정적 도움도 받을 수 없었던 내가 지금은 내 명의에 수도권에 집도 있고 1등급의 신용등급을 유지한다.
이렇듯 30대 초반에 시작해도 가능한 일이니, 나보다 출발점이 좋은 상황이라면, 누구나 방법만 잘 알고 실행한다면, 나보다 더 빨리 더 좋은 사회적, 경제적 자리를 잡을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