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일곱 일기

2019년 12월 28일

by 변호사엄마 레지나

저녁식사를 마치고 아이들을 씻기고 잘 채비를 챙겨두고 집을 나섰다. 하루 종일 아이들과 함께한 사람에게 잠깐의 자유시간을 주는 것이 우리 부부 사이의 룰이다. 남편은 종일 급한 일을 처리하느라 출근하여 일을 하다 저녁때가 다 되어 귀가하였다. 그러니 내가 자유의 시간을 가질 차례다.


어디로 향해야 하나. 사실 그리 밖에 나가고 싶지 않은 날이었다. 자유는 늘 고픈 것이지만 고된 하루를 보낸 뒤라 뜨뜻한 아랫목에 몸을 지지고 늘어져있고 싶기도 하였다.


부모님은 지금과 같은 '부동산 청약 광풍'이 불기 전 우연한 기회에 서울 변두리에 아파트 청약을 하였고 경쟁이 치열하던 시기가 아녔던지라 결과는 당첨이었다. 추상적인 단어로 존재하던 '입주권'은 땅을 파고 터를 다지더니 높이 올라가 사람들이 사는 신축 아파트 단지가 되었다.


아버지는 그 지역을 가끔 가다 둘러보는 눈치였다. 땅이 잘 파지고 있는지, 공사가 잘 진행되는지 눈으로 보면 뭘 알까싶지마는 그렇게 한 번씩 확인하고 돌아오곤 하였다. 시찰은 아파트가 높이 지어질수록 그 빈도가 더 잦아졌고, 본격적으로 사람들이 이사 들어오는 시기가 되면서 거의 출근하다시피 하는 것 같았다.


평생 살림이라고는 엄마에게 맡겨 둔 채 까막눈으로 살아오신 터라, 화장실에 휴지가 떨어지면 어디서 꺼내야 하는지도 모르는 아버지가, 신축 아파트 입주 절차를 혼자 밟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내가 급히 호출을 받고 함께 동행하였던 것이다.


나이가 지극하신 '입주 매니저'는 프로의 마인드로 친절하게 설명을 해주었다. 디지털 도어록 비밀번호 설정하는 방법, 개수대의 음식물 쓰레기 처리기 세팅하는 방법, 차량 태그 설치하는 방법, 빌트인 비데 설치하는 방법 등. 20년째 살고 있는 집에서 음식물 쓰레기를 어찌 버려야 하는지 알지 못하는 아버지가 그 설명을 어디까지 이해했을지.


몸이 노곤해져 당장 침대에 눕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지만, 종일 아버지의 일을 봐주며, 동시에 '엄마'를 한 백 번 정도 외치는 남매와 함께 보내니 고독한 시간이 간절하다. "저녁 먹고 갈래?"하고 묻는 엄마의 말에 '너무 오래 같이 있었던 것 같아.' 했다.


어디로 향해야 하나. 생각이 없을 땐 발길 닿는 대로. 단골 커피숍은 그동안 리모델링을 하여 더 멋진 공간이 되어 있었다. 아! 분위기 있는 음악과 조용한 분위기.


사람은, 아니 나는 혼자의 시간이 필요하다.



오래간만에 가족들과 함께 오랜시간을 보낸 뒤 깨달음을 얻은 하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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