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신교회, 고해성사 부활?
세월의 강물은 멈추지 않고 흘러, 삶의 황혼녘에 다다르면 우리는 문득 저 멀리 보이는 영원의 지평선을 응시하게 됩니다. 청춘의 열기가 식고, 세상의 소음이 잠잠해질 때, 비로소 영혼은 자신이 걸어온 길의 그림자들을 봅니다. 그 그림자는 다름 아닌 '죄'라는 이름의 무게이며, 이 무게는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선명해져 우리를 침묵 속으로 이끌지요.
그때서야 비로소 우리는 두려움 섞인 간절함으로 구원의 목소리를 찾게 됩니다. '이 짐을 어디에 내려놓아야 할까?' '이 죄의 낙인을 어떻게 지워야 하는가?' 나이 듦은 결국 육체의 쇠락을 넘어, 영혼의 정화와 회복을 위한 가장 절실한 기도를 시작하는 시간이 됩니다.
죄를 사할 수 있는 회개 기도, 그 간절한 부르짖음 앞에서, 우리는 스스로에게 묻습니다. 우리의 용서는 과연 충분한가, 혹은 누군가의 권위 있는 선언이 필요한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여정은 단순한 육체의 치유를 넘어선, 영혼 깊은 곳의 어둠을 걷어내기 위함이었습니다. 만일 그분의 사역이 잠시 스러질 육신의 고통만을 덜어주는 의술에 그쳤다면, 어찌 우리가 그분을 영원한 구세주라 부를 수 있었을까요.
인간의 가장 깊은 불행은 외적인 결핍이 아닌, 하나님과의 아름다운 관계를 끊어버린 '죄'라는 영혼의 질병입니다. 이 죄의 붉은 낙인을 지우고, 깨어진 교감을 회복하시려는 것이 바로 주님 오신 이유였습니다.
구약의 선지자는 이미 이 자비로운 약속을 시적으로 노래했습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 (이사야 1:18).
이 약속을 완성하시기 위해, 주님께서는 당신의 사죄(赦罪) 권능을 교회라는 가시적인 공동체에 남기시려 했던 것은 아닐까요.
구세주께서 십자가의 구속 사역을 마치신 후, 그 무한한 사면의 은총이 시대를 넘어 모든 영혼에게 전달될 수 있도록 마련하신 계획은 무엇이었을까요?
주님께서는 개개인의 회개 순간마다 하늘에서 내려오시어 직접 사죄를 선언하는 대신, 그분의 거룩한 이름을 대리하여 용서를 선포할 신성한 권능을 성직자들에게 맡기셨습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 숨을 내쉬며 평강을 빌어주신 후, 이 중대한 권한을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이 말씀을 하시고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요한복음 20:21-23).
이 말씀은 교회가 천국에 이르는 열쇠를 맡아, 인간의 대리자를 통해 하나님의 인자하신 계획이 실현될 수 있는 신비로운 통로가 되었음을 암시하는 것은 아닐까요?
원죄를 씻어내실 목적으로 세례성사를 제정하신 주님께서, 세례 이후에도 끊임없이 죄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인간을 위해 죄를 용서하실 또 다른 제도를 마련하셨다면, 그것이 고해성사의 기원이 된 것은 아닐지 깊이 생각해 봅니다.
사도들의 사역을 들여다보면, 그들은 주님의 권능으로 죽은 육신을 일으켰습니다. 그렇다면 죄악으로 죽은 영혼을 은총으로 소생시키는 일, 곧 사죄의 은혜를 베푸는 일이야말로 그들에게 맡겨진 가장 본질적인 사명이 아니었을까요?
초대교회 신자들이 빛 가운데서 자신의 행한 일을 알리며 "믿은 사람들이 많이 와서 자복하여 행한 일을 알리며" (사도행전 19:18) 구원의 확신을 찾았던 것처럼, 죄를 숨기지 않고 드러내어 고백하는 행위는 구원의 확신을 얻는 오래된 통로였을 것입니다.
"하나님께 직접 고백하면 그만이지, 왜 인간에게 고백해야 하는가?"
이 의문은 오늘날만이 아니라 이미 1,400여 년 전부터 인간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질문입니다. 이 질문에 대해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깊은 성찰을 촉구하는 반문을 던졌습니다.
만일 하나님께 직접 고백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면, 주님께서는 왜 당신의 사도들에게 이토록 강력한 말씀을 남기셨을까요?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마태복음 18:18).
성인은 이 말씀을 상기시키며, 그리스도께서 사도들에게 '너희가 땅에서 푼 것은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고 하신 말씀이 헛된 울림이었단 말인가, 또 교회에 천국열쇠를 맡기신다는 말씀도 무의미한 일이었단 말인가, 하고 우리에게 되묻는 듯합니다.
이것은 꾸짖음이라기보다, 주님께서 친히 제도화하신 가시적인 권능의 위임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는 성인의 깊은 영적 통찰이 아닐까요?
고해성사가 없는 제도 속에서, 인간의 마음은 스스로를 위로하고 죄의 무게를 덜어내려 하기 쉽습니다. 밤이 되면 홀로 무릎 꿇고 앉아 기도한 뒤 "이제 다 용서되었겠지"라고 짐작하며 안심하는 행위는, 죄가 사해졌다는 객관적인 선언이나 확증도 없이 스스로에게 건네는 막연한 자위는 아닐까요?
죄 사함은 죄를 지은 자의 주관적인 '느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대리자를 통한 객관적인 '선언'으로 주어질 때 비로소 영혼에 흔들림 없는 평안을 가져다줍니다.
누렘베르크의 개신교회 당국자들이 교인들의 도덕적 해이를 우려하여 황제(칼 5세)에게 고해성사 부활을 청원했던 역사적 사례는, 이 제도가 개인의 영혼을 다잡고 공동체의 거룩함을 지키는 데 있어 얼마나 필수적인 균형추였는지 반증하는 슬픈 고백일 것입니다.
성직자에게 죄를 고백하는 것에 대한 망설임은 혹시 고해 내용이 누설될까 하는 기우에서 비롯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의사나 변호사도 직무상 비밀을 철저히 지키도록 교육받는데, 영혼의 구원이라는 지극히 거룩한 사명을 맡은 목사나 사제들에게는 더욱 엄중한 영적 윤리가 요구되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특히 가톨릭교회에서는 고해 내용을 누설할 경우 다시는 그 직책을 수행할 수 없도록 하는 강력하고 엄밀한 제도적 장치(고해의 비밀)가 마련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비밀을 보장하는 엄숙한 제도의 틀 속에서, 성직자는 사적인 감정을 배제하고 오직 그리스도의 권한을 대행하는 사면 선언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세월이 흘러 삶의 황혼기에 다다르면, 우리에게 가장 절실해지는 것은 구원에 대한 흔들림 없는 확신일 것입니다.
필자 역시 그 마지막 순간, 나의 모든 허물과 죄를 고백하고 권위 있는 선언을 통해 죄 사함을 받았다는 깊은 믿음을 안고 눈을 감고 싶은 간절한 소망이 있습니다.
이는 단지 신앙적인 문제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심리학적으로도, 인간이 죽음을 앞두고 미결된 영혼의 짐을 덜어내는 행위는 가장 큰 평안을 가져다줍니다.
누군가 나의 죄의 고백을 듣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용서받았음'을 엄숙하게 선언해 줄 때, 그 마음은 비로소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평화로이 영원한 안식처를 향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홀로 드리는 회개 기도만으로는 때때로 이 확신이 막연하고 주관적인 위안에 머물기 쉽습니다. 나의 고백이 정말 하늘에 닿았는지, 나의 용서가 객관적으로 '완료'되었는지에 대한 의구심이 남습니다.
결론적으로,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위임하신 사죄권을 정당하게 대행할 수 있는 권한과 윤리적 책임을 갖춘 목사나 사제를 통해, 삶의 황혼녘에 우리의 죄를 드러내고 용서받는 선언을 듣는 것은, 막연한 희망이 아닌 확고한 평안을 안고 하늘나라로 향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영적 통로가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