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르는 세월, 그 강가에 서서

ACE 31 연말모임에 부쳐

by JayGee JIN
KakaoTalk_20251124_193615185.jpg 모임에서 고기로 한껏 배를 불리다.


벽에 걸린 달력의 마지막 장이 위태롭게 매달려 있는 것을 보니, 또 한 번의 계절이 우리 곁을 떠나갈 채비를 마친 듯하다. 거리에 나뒹구는 낙엽들이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낼 때마다 마음 한구석에도 스산한 바람이 인다. 이맘때가 되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연말 모임, 바로 'ACE31'이다.


ACE31. ‘Advanced English Course’라는 거창한 이름으로 시작된 인연이었다. 영어라는 낯선 언어를 매개로 만났지만, 우리가 나눈 것은 단어와 문법이 아닌 삶의 희로애락이었다. 서로의 부족한 발음을 고쳐주며 웃고, 때로는 수업이 끝난 뒤 축구를 하고 술잔을 기울이며 인생의 고단함을 토로하며 대화를 나눴던 그 시절.


그렇게 쌓아올린 시간이 어느덧 33년이라는 거대한 나이테를 형성했다. 강산이 세 번이나 바뀌고도 남았을 긴 세월이다.


성인이 되어 사회라는 정글 속에서 만난 사이였음에도, 우리는 마치 코흘리개 시절 골목길을 누비던 초등학교 동무들처럼 끈끈했다. 이해타산 없이 순수한 열정으로 뭉쳤던 까닭일까. 지금은 서로의 눈빛만 봐도 오늘 하루가 어땠는지 가늠할 수 있는, 그런 깊고 푸근한 정서가 우리 사이에는 흐르고 있다.


그러나 세월의 흐름은 거스를 수 없는 강물과도 같다. 왁자지껄했던 예전의 모임 풍경은 이제 기억 속의 사진으로만 남아 빛바래 간다. 한때는 빈자리가 없을 정도로 북적였던 테이블이었건만, 이번 모임에 얼굴을 비친 이는 고작 일곱, 여덟 명 남짓이다.


먹고사는 일이 바빠서일까, 아니면 나이 듦이 주는 고단함 탓에 동참 의식이 희미해진 것일까. 줄어든 인원수만큼이나 커져버린 빈 공간을 바라보며, 나는 문득 가슴 저릿한 무상함을 느낀다. 떠나간 이들의 빈자리가 유난히 크게 다가오는 밤이다.


술잔을 부딪치며 서로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본다. 33년 전, 패기 넘치던 청년들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그 자리엔 세월의 풍파를 견뎌낸 중후한 노 신사들이 앉아 있다. 거울 앞에 설 때마다 늘어가는 주름과 아예 완전 백발이 되어버린 머리카락을 마주하는 것이 우리네 일상이 되었다.


우리는 애써 세월을 부정하려 든다. 머리 위에 내려앉은 하얀 눈을 감추기 위해 짙은 염색약으로 포장을 하고, 아직은 청춘이라며 너스레를 떤다. 하지만 검게 물들인 머리카락 뿌리 사이로 비집고 나오는 세월의 흔적까지 감출 수는 없다. 백발이 되어가는 머리카락은 우리가 지나온 치열했던 삶의 훈장일지도 모르건만, 우리는 여전히 흘러가는 세월이 야속해 억지로 젊음을 흉내 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씁쓸한 미소가 지어진다.


누군가 말했다. 인생을 거꾸로 생각하면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다시 순수로 돌아가는 과정이라고. 그렇다면 지금 우리의 나이는 아마도 초등학교 저학년쯤 되지 않았을까. 사회적 지위도, 체면도 내려놓고 오직 서로를 향한 투박한 진심 하나로 마주 앉은 지금, 우리는 영락없는 아이들이다.


이제 한 달 남짓 남은 시간, 또 한 해가 저물어 간다. 흐르는 물을 막을 수 없듯, 가는 세월을 잡을 수는 없다. 줄어드는 친구들의 숫자와 늘어가는 흰 머리카락을 보며 느끼는 이 슬픔과 허무함은 어쩌면 살아있는 자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일지도 모른다. 비록 모이는 인원은 적어졌지만, 33년을 이어온 우리의 우정은 그 어떤 보석보다 단단하게 빛나고 있다.


저물어가는 한 해의 끝자락에서, 염색으로 가린 백발의 친구들과 나누는 소주 한 잔이 참으로 달고도 쓰다. 이 무상한 세월 속에서도 변치 않고 곁을 지켜주는 그들이 있어, 다가올 겨울이 마냥 춥지만은 않을 것 같다. 부디 내년에도, 후년에도 이 끈끈한 정이 계속되기를, 얇아진 달력을 보며 조용히 소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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