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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엄마건축가 Aug 18. 2023

출근한 지 네 시간 만에 퇴근하는 이야기

Cash & Carry. 회사 근처 아시아마트의 이름이다. 독일어도 아니고 영어로 되어 있는지라 독일 생활 초반에도 눈에 띄는 마트였다. ‘외상은 절대 금지. 돈 내고 가져가세요’를 함의한 가게 이름인가, 친구들과 열띤 토론을 하기도 했다. 그때만 해도 왠지 오만한 이름의 이 가게는 가고 싶지도 않고, 도시 끝에 있는지라 갈 일도 없었다. 하지만 운명인가 싶게 나는 바로 옆 회사에 취직했고, 생활 반경 내에 있어 당일 조달 가능한 유일한 아시아마트가 되었다.


‘중앙역-시내-회사’를 잇는 지하철 노선이 있다. 한국으로 치면 국철 혹은 1호선 느낌이랄까. 나는 집 앞에서 4호선을 타고 시내에서 내려 이 국철로 갈아타고 두 정거장 지나면 있는 회사로 출근한다. 그런데 이 국철이 7월 말부터 9월 초 까지 약 두 달 운행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5년 전부터 다니던, 이제는 발이 저절로 움직이는 이 루트를 변경해야만 했다. 그래서 버스를 탄다. 4호선을 타고 시청에서 내려 44번 버스를 타는 방법이 가장 효율적이다. 거의 기다리지 않고 환승할 수 있고, 가장 적게 걷는다.


하나 단점은 Cash & Carry를 지나지 않는다는 거다. Cash & Carry는 전철역 바로 앞에 있어서 참새 방앗간 들리듯 갈 수 있었지만, 버스 정류장은 반대편에 있기 때문에 마트에 들렀다 다시 회사를 거쳐 버스를 타야 해서 아주 번거롭게 되었다.


번거로운 일이지만 문제는 아닐 수 있는데, 여기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점은 내가 굉장한 계획러라는데 있다. 1분, 11분, 21분… 매 1분마다 회사 앞에 오는 44번 버스를 타기 위해 5분에 회사에서 나온다. 그러면 버스 정류장에 17분이면 도착하는데, 문제는 그 사이에 아시아마트에서 사야 할 것이 생각날 때다. 집에 간장이 떨어진 지 3일째라 오늘은 꼭 간장을 수급해야 했다. 빠른 걸음으로 가게에 들어가 항상 있는 그 자리의 진간장을 겟. 계산대에 왔지만 주인 아주머니가 자리에 없다. 항상 이런 식이다. 하던 일을 충분히 마무리하고 오신다. 속으로 빨리빨리를 외치지만 입 밖으로 뱉을 수는 없다. 여기는 모두의 권리가 보장되는 독일이니까. 계산을 하고 영수증은 됐어요 하고 외치니 카드 결제가 됐는지 잠깐 기다려야 한단다. 찌지직- 영수증이 나오는 소리를 듣자마자 문을 박차고 나와 회사 방향으로 달리는데 저 멀리서 노란 44번 버스가 보인다. 가방 바닥엔 900미리리터의 간장이, 그 위로는 돌돌 말린 A0 고급종이 세 장이 아슬아슬하게 꽂혀있다. 공모전 패널 시험 플롯 한 것들인데, 우리 아이들 큰 종이에 그림 그리라고 챙겨 온다는 게 하필 오늘이다. 위아래로 요동치는 에코백을 간신히 부여잡고 뒤뚱뒤뚱 뛴다. 너그러운 버스기사 아저씨 덕분에 10분을 더 기다리지 않아도 되었다.


10분은 매우 중요하다. 내 근무시간은 9 to13이다. 그런데 요새 아침에 좀 늦게 일어나다 보니 오늘은 9시 15분에 출근했고, 성실한 근로자로서 13시 15분까지 일을 하고 나왔다. 이 시간에 집에 가도 빨라야 두시에 점심을 먹을까 말 깐데, 두시 십 분에 밥을 먹는다는 건 너무하다. 그렇게 집에 와서 감기 걸린 남편과 진라면 매운맛에 계란 두 개를 넣어 끓여 먹었다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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