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두둑 투두둑 가을 소리가 귓가에 맴돈다
잠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을 여니 바람이 선선하다. 이즈음이면 건물 안보다 바깥이 더 시원하다. 바람에 이끌려 밖으로 나왔다가 그 바람에 등 떠밀려 등산로 입구까지 크게 돈다. 그때 절에서 내려오는 것으로 보이는 할머니 한분이 길가 철조망 안으로 손을 넣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가까이 다가가 뭔가 봤더니 잡초 사이에 떨어진 밤을 줍는 것이다. 움켜쥔 할머니의 주먹이 보자기처럼 펼쳐지자 매끈하고 단단한 밤알이 드러난다. 아, 여기 밤나무가 있었어? 그동안 아래만 보고 위는 보지 못했다니. 큼직한 밤나무를 올려다보니 성게 같은 밤송이가 그대로 인 것도 있지만 벌어진 것이 꽤 많다. 저거 따고 싶다, 털어서 주울 게 많네, 그러고 섰는데 나이 지긋한 동네 어르신이 지나가면서 그러다 목 빠지겠네, 한다.
불현듯 어린 시절이 떠오른다. 철조망을 딛고 올라 나무로 옮겨 타는 열 살짜리 개구쟁이 사내아이가 보인다. 잠시 후 투두둑 투두둑 소리가 들린다. 밤이 위에서 아래로 떨어졌다는 확실한 증거는 투두둑 투두둑하는 소리다. 나무 위로 올라간 사내아이와 나무 아래에서 밤송이를 한데 모아가며 망을 보는 계집아이는 한통속이다. 나무에 올라간 오빠는 저리 비켜,라고 소리 지른 다음 나무를 힘껏 흔들어댄다. 투두둑 투두둑 투둑투둑...... 소리가 멈추면 동생은 나무아래로 들어가 밤송이를 끌어내 벌어진 사이로 양발로 밟아 벌리고 작대기를 사용해 알밤을 캐낸다. 때가 차서 저절로 떨어진 밤송이로도 모자라 욕심내서 나무를 탄 걸까. 나무 타기가 좋아 올라간 김에 밤송이를 털게 된 걸까. 밤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냥 재미있는' 놀이가 아니었을까.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필름이 끊긴 듯 그다음은 생각이 안 난다. 밤을 털고, 줍고, 까며 종일 놀긴 놀았는데 그것들을 모아 어떻게 했는지는 기억에 없다. 이 몹쓸 기억력.
망보던 옛날의 여자아이는 집으로 돌아오는 동안 현재로 돌아온다. 그동안 잠에서 일어나 있는 남편과 마주 앉았을 때 뜬금없이 밤농장에 같이 가보자고 말한다. 내가 한번 알아볼게. 정안까지 말고 가까운 어디 있을 거야. 알밤껍질은 당신이 까. 쪄먹는 것보다 깎아먹는 게 맛있으니까, 생으로 먹고 남으면 냉동했다가 밥 지을 때 넣어먹자. 뜬구름 잡는 이야기를 곧잘 하기 때문에 남편은 그러려니 하고 괜찮은 생각 같아서 그러자고 한다.
밤의 뾰족한 가시는 아마 동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장치일터, 열매가 익으면 가시는 갈색으로 변하고 무뎌져 알밤만 남기고 흙으로 돌아간다. 제 역할을 충실히 마치고 버려질 껍데기만 남아 뒹굴다 묻힌다. 껍데기에서 밖으로 나온 매끈하고 토실한 밤은 밥이 되기도 하고 약으로도 쓰여 에너지와 기쁨이 된다. 이제 글은 그만 쓰고 몸에는 약, 마음에는 기쁨이 될 알밤을 주우러 갈 농장을 물색하자. 때가 때인 만큼 서두르는 게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