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식에 관한 한 神이 되고 싶었던 엄마
"남의 자식들 키우느라 내 자식을 놓쳐버렸어. 내 아이가 저렇게 힘들어하는데..... 엄만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더라." 아들이 우울증이라 힘들어한다면서 말을 꺼냈을 때 친구의 마음을 알겠어서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친구는 정년을 앞둔 학교선생님이었는데 평소 씩씩했고 나한테 어려운 일이 생기면 무슨 수가 있을 거야, 방법을 찾으면 된다니까 했더랬다.
자식이 힘들면 엄마들은 왜 죄책감이 드는 걸까. '어쩌다 이런 일이, 도대체 뭐가 잘못된 걸까?'에서 시작된 질문은 '내가 뭘 잘못한 거지, 좀 더 잘했어야 했는데'까지 터질 듯 커져만 간다. 완벽하진 않지만 최선을 다했는데, 다 큰 자식을 두고 엄마들은 '네가 최선을 다한 거 맞아, 정말?'이라며 자신을 다그치게 된다. 그래봤자 소용없고 누구나 한계는 있는 거라고 다독여봐도 좀처럼 자책감은 줄어들지 않는다. "진작 알았더라면 달랐을까." "너나 나나 그때 그게 최선이었어." 우리의 결론은 이랬지만 그렇다고 자책감이 시원하게 해소되는 건 아니었다.
자책감의 뿌리는 '엄마라면 마땅히 ~ 해야 한다'는 핵심믿음 때문이란 생각이 들었다. 여러 사정이 있음에도 그것을 고려대상에서 빠뜨린 채 잘못을 인정하고 뉘우치면 끝날 일을 마땅히 하지 못했다고 자기 비난을 한 셈이다. '엄마라면 마땅히 ~ 해야 한다'는 핵심믿음을 버리는데 도움이 된 작가가 둘 있다. 소설가 박완서와 여성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펄벅, 자세히 말하면 박완서의 <한 말씀만 하소서>와 펄벅의 <달래 지지 않는 슬픔>두 권의 책을 통해서다. 교통사고로 아들을 잃은 엄마와 정신지체아 딸을 둔 엄마를 만났다. 책을 읽었던 당시에는 무심코 지나쳤던 문장이 이번에는 그들의 눈과 귀와 마음이 되어 전해졌다. 그들도 자책감에 시달렸고 슬픔에 잠겼지만 자책감과 슬픔을 글로 흘려보냈기 때문에 견딜 수 있지 않았을까. 불가항력적인 삶 속에서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것 말고 달리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 게 아니었을까.
'엄마라면 마땅히 ~ 해야 한다'라는 건 없어. 진작 알았더라도 다르지 않았을 거야. 그때 그게 최선이었으면 그것으로 끝. 이런 결론에 닿기까지 친구와 저 사이에 다음과 같은 말들도 오갔다. 우리 힘으로 저항하거나 막을 수 없는 거라면 어쩔 수 없는 영역인 거야. 차라리 이렇게 말하는 게 나은 것 같아, 잘못해서가 아니라 힘들어서 자책하는 거라고, 자책 말고 위로해 줘야지 그렇지 않아도 힘든데, 우리가 모자란 건 지극히 정상이야, 신이 아니잖아, 자식의 고통마저도 좌지우지할 수 있다는 엄청난 착각, 교만이지 않을까, 우리가 神이라도 된 양 굴었던 거잖아, 자식에 관한 한 엄마는 神이 되고 싶은가 봐.
천천히. 가만히. 들여다보면 내가 다 맡아서 해결하고 끝장 보려는 오만함이 보인다. 오만함에 감추어진 진짜 마음을 고백하자면 '엄마는 처음'이라 몰랐어, 어리고 미숙한데도 잘하고 싶은 욕심만 컸지, 이 정도일 건데.
그때 몰랐어도 괜찮고 늦게 알았다고 해서 문제 될 게 없다는 생각이 나를 달래준다. 사람이나 상황을 좌지우지할 수 없다는 것을 깊이 받아들이자 자책감이 사그라들고 기도도 달라졌다. 위대한 힘에게 회복시켜 달라고 구하는 것은 같지만 속알맹이는 바뀌어 있었다.
제 눈앞에 벌어지고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하소서! 어쩔 수 없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