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황을 있는 그대로 보는 힘
"초연함이란 건강한 관계를 이루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다. 우리 각자는 자유스러운 개인으로서 다른 사람의 간섭을 받지 않는다."
아침마다 읽는 갬아넌(도박중독자가족모임) 교본 <하루하루에 살자>에 나오는 글이다. 사전을 찾아보니 초연超然이란 어떤 현실이나 상황에 얽매이지 않고 의젓하게 행동하는 태도라고 나와있다. 갬아넌 모임에서 초연超然이라는 말을 빈번하게 듣는데 그만큼 초연이 중요하지만 잘 되지 않기 때문인 것 같다.
개의치 않고 신경 쓰지 않는 거라면 외면일 테고 한계를 넘어 확장되는 것은 초월일 텐데 그럼, 초연은 와닿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반발심이 들기도 한다. 폭풍 속을 헤매는데 무슨 초연? 난파당하기 직전인데 무슨? 분에 넘치고 사치스럽고 안이한 말 같았다. 폭풍이 다 지나간 다음이라면 모를까.
그래도 초연, 초연하니까 초연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초연에는 무언가 뛰어넘는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으니 자연스럽게 교본에 나오는 '위대한 힘'을 '하느님'으로 바꿔 불렀다. 내가 천주교 신자라 그랬던 건데 그래봤자 크게 달라진 것 없었다. 묵주반지를 끼고 주일미사를 다녀도 속으로는 하느님으로부터 우리 母子, 우리 가정이 내팽개쳤다고 느끼고 있었으니까. 감히 앞에서 대들지 못하고 뒤에서. 저주를 받았다고 느끼는 제 쪽에서 저주를 내렸다고 확신한 하느님을 향해 저주를 퍼붓고 있었다. 그래서 속 시원하냐고 묻는다면 나는 한 술 더 떠서 당신이 바란 게 이런 거였냐는 식으로 대들었다. 바깥에서는 개인회생, 추심, 보험약관대출...... 파도가 밀려오듯 문제가 터지고 있는데 날마다 <하루하루에 살자> 교본에서 초연을 말하고 있었다. 얼어 죽을 초연! 사라졌다가도 다시 곁에 와서 맴도는 단어. 자꾸 신경 쓰이는 말.....
“받아들인다는 것은 입장이 낮아지는 상황에 복종한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처해있는 상황을 사실 그대로 받아들인 후에 그것에 대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결정한다는 뜻이다.”
거부감과 의문만 차오르던 어느 날 이 구절을 접하는 순간 받아들이면 초연해질 수 있는 것이구나 싶었다. 조금은 알아듣게 된 것 같았다. '그냥 살지, 뭐.' '죽기밖에 더하겠어.' 최악의 상황을 그려보고 '이제 내 안에 힘이 없다.''나는 아무것도 아니야.' 이 말이 주문이 되어 언제 그랬냐는 듯 평온해졌다. 아들이 도박을 하든 말든, 아들이 빚을 갚든 말든, 아들이 거짓말을 하든 말든 상관하지 말라는 가르침이었다. '어쩔 수 없는 것' '통제불가한 것' 냅두라고. 휘말리지 말라고. 일정하게 거리를 두라고. 참아낼 것 없이 무심코 바라보는 '관찰자'가 되라고. 받아들이면 초연해지고 초연해지면 받아들이게 되니 초연함과 받아들임은 동전의 양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