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자 자기 몫의 삶을 살 수 있다면
갓 졸업한 애를 내보내려면 한두 푼 드는 게 아닐 텐데. 월급에서 월세 내고 나면 요즘 애들 살기 힘들다더라. 도박문제가 있다면서, 그럴수록 눈앞에 있어야 관리가 되는 거지. 너희 큰 애 건강이 좋지도 않은데, 괜찮겠어. 나가 살면 밥이나 제대로 챙겨 먹겠니.
10년 전 큰애를 내보낼 때, 주변에서 말이 많았다. 아들의 도박문제를 아는 사람이나 모르는 사람이나 한결같이 걱정을 했다. 하나같이 염려의 말이라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우리 집 세 아이 모두 성인이 됐다. 어서 빨리, 제발, 부디 독립했으면 좋겠다고 한 게 드디어 이루어졌다. 어려서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얘기해 온 대로, 세 아이 모두 학업을 마치고 직장을 구해 집을 떠났다. 도박문제가 있는 첫째는 10년 전에 이미 독립했고 이제 네 살 터울, 두 살 터울의 동생들까지.
한 남자를 만나 둘에서 시작해 다섯 식구로 불어나 북적대다 다시 둘이 되었다. 평수를 줄여 내려앉으면서 남은 돈에 모은 돈을 보태 '독립자금'을 분배하고. 둘째는 독립자금 대부분으로 집을 얻었고 사회초년생인 막내는 잠만 자는 방에 돈을 깔고 있을 수 없다고 쪼그만 방을 구했다. '아픈 손가락' 첫째는 10년 전 전세권설정등기를 했던 원룸에서 밀린 월세와 관리비 제하고 남은 돈으로 월세방에 들어가 있다. 엄마이름으로 계약했고 월세나 세금, 공과금, 지인빚, 벌금... 재정관리는 도와달라고 해서 내가 맡고 있고. '진짜' 독립은 물리적인 분리뿐만 아니라 재정적, 정서적인 것까지 포함하는데 큰애는 도박병을 앓고 있으니 어쩔 수 없다.
큰애는 나가 살 때만 해도 번듯한 직장도 있었고 상담도 받고 있어서 걱정을 덜 했다.'제가 알아서 할게요.' '잘 지내고 있어요.'라고 해서 그런 줄 알았다. 어차피 대리변제는 없을 거니까 도박을 하는지 의심이 가도 묻지 않았는데. 안 갚아줄 거면서 무슨 상관이냐는 마음이었는지. 개인회생 법원허가가 떨어질 때만 해도 다행이다 싶었는데. 매일 출근할 직장이 있었고 루틴이 있으니 그래도 안심이었는데...... 도박문제의 '심각성'이 도를 넘어 듣고도 믿기지 않는 일들이 벌어졌다. 아들은 이미 권고사직에 사채까지 빌렸고, 추락하고 있었다. 진즉에 알아챘어야 했는데. 내 딴에는 해볼 거 다 해봐도 안돼 진이 빠져버린 상태였고. 하지 말라고 한다고 안 하는 게 아니라서 입을 닫아버리고 있었다. 아무 소용이 없단 생각으로 손 놓고 있었다. 나가 사니 일단 눈앞에 보이지 않아 무시하고 넘어가기 좋았고 연락 오지 않는 이상 연락하지 않으면 나 몰라라 할 수 있었다.
독립이 아니라 고립. 스스로 자기 삶을 꾸려갈 수 있어야 독립인 건데.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홀로 서려니 고립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큰애는 가족 눈치 보지 않고 감시의 눈도 피할 수 있으니 차라리 혼자가 편하다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겉으로 잘 지내는 척 가면을 쓰고.
따로 떨어져 혼자 지내는 동안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겠죠. 자기만 빼놓고 (심리적으로는 본인이 더 어리다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아는데) 자기보다 어린 동생들이 엄마, 아빠하고 그들만의 세상에 사는 것으로 보였을지도.
"에고, 이게 무슨 일이래. 경찰이 왔다고, 아들이 죽는다고 했다는데... 어쩜 좋아. 빨리 와봐."
주인집 아주머니에 의하면 누군가 자살의심신고를 해서 경찰이 출동한 거라고 했다.
전화를 받고 허겁지겁 옷을 챙겨 입고 가는 도중 이번에는 경찰이 전화를 했다. 다행히 아들과 연락이 닿았다고 일단 안심하시고 파출소에 데리고 있으니 그리로 오라고 위치를 알려주었다.
아들은 힘들다는 신호를 여러 번 보내왔다. 여기저기 SOS를 쳐서 자신의 힘든 상황을 알렸다. 도박중독자가 죽겠다고 협박을 할 때도 있고 그걸 빌미로 대리변제를 요구하기도 한다는 걸 진즉에 알고 각오를 하고 있었지만. 막상 그런 상황을 마주하니 정신이 혼미해지고 가슴이 떨렸다. 정말, 정신 바짝 차려야 하는 상황. 감정을 가다듬어야 한다. 자살조차도 미끼가 될 수 있다니 너무나도 슬프다. 그래도 빚은 갚아주지 않았다. 그동안 견딘 게 말짱 도루묵이 되면 안 되니까. 내가 죽는다는데 엄마가 차마.... 이런 생각이었겠죠.
당당하게. 혼자힘으로. 자기 삶을 영위할 수 없으면 독립이 아닌데. 병든 아들, 준비도 안 된 아들을 독립이 아닌 고립으로 내몬 것 같았다. 물론 도박빚만큼은 단호한 선긋기가 필요하지만 그 외의 부분에 대해서는 서로 교감하고 부대껴야 하는 것인데 그게 잘 되지 못했던 것 같다. 엄마라는 사람이 자기 하나 감당이 되지 않아 헤매고 있었으니 '아픈 손가락'보다 내가 겪는 아픔이 더 커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었으니. 아파봐야 건강이 재산인 걸 알고 잃은 뒤에야 그것이 소중한 걸 안다고 하는데 정작 잃고 나면 무슨 소용이 있나. 하마터면 금쪽같은 아들을 잃을 뻔했지만 나는 끝까지 네가 싼 똥은 네가 치워야 한다. 그 나머지는 얼마든지 도와줄 수 있다는 말만 반복했다.
아들을 포기할 수없다. 엄마라서 포기할 수 없는 게 아니라 포기가 안 되는 게 엄마인 것 같다. 정신과에 가서 진단을 받고 약도 받고 한고비를 넘긴 다음 일주일에 한 번은 갬아넌 모임에서 만난다. 같은 곳 다른 장소 GA모임을 마친 아들을 만나 안아준다. 돈을 줄 수는 없지만 밥을 해줄 수 있고 빚을 대신 갚아줄 수는 없지만 등 두드려주고 안아줄 수 있다.
독립했으면 근근이라도 자기 몫의 삶을 살면 되는 거 아닐까. 고립되지 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