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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맘디터 Jun 05. 2022

우리들의 블루스 동석 편을 보며

친정엄마의 입장에서 나를 바라보다

오늘도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를 보기 위해 집에서 10분 거리의 친정엄마 집에 걸어갑니다.

집에 TV를 놓고 싶지만, 아기곰들 때문이 아니라 저 때문에 놓을 수가 없습니다. 저는 프로그램이 저를 몰입시키지 못하면 30초에 한 번 꼴로 200개의 채널을 처음부터 끝까지 돌리는 이상한 버릇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의 블루스 속 엄마와 아들 간의 애증을 보며 극적인 설정과 별개로 누구에게나 입 밖에 꺼낼 수 없는 부모자식 간의 서운함이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합니다.

저는 엄마와 자주 툭탁거리는 이유 중에 하나가 엄마가 상해가는 음식을 냉장고에 방치하는 겁니다. 아이들이 사용하는 냉장고에 상해가는 음식이나 채소가 있는 것도 정말 속상한데, 그걸 버리려고 하면 엄마가 먹겠다며 어떻게든 본인 입으로 넣으시는 겁니다. 고성도 오가고 말려도 보았지만 소용 없습니다. 친정 어머니의 손이 닿지 않는 주위 엄마들의 냉장고 안이 깨끗한 걸 보면 얼마나 부러운지 모릅니다. 그래서 저는 엄마가 약속이 있어서 집에 안 들르시는 날에 냉장고에 있는 식재료들을 싹 정리합니다.

그런데 나의 해방일지와 우리들의 블루스를 보기 위해 늦은 밤에 엄마 집을 들락날락하며, 잠든 엄마 옆에서 엄마의 공간을 유심히 관찰하게 됩니다. 다이소의 조화가 군데군데 있는 걸 보니, 엄마가 꽃을 정말 많이 좋아하는구나... 알았습니다. 저는 잎이 크고 푸르른 식물들을 집에서 키우는데 그걸 볼 때마다 엄마는 왜 예쁜 꽃을 안키우냐고 너무 아쉬워하셔서 무심히 넘겼거든요. 엄마 방에 놓여진 다이소 꽃들을 보니 꽃을 좋아하는 엄마 눈에는 푸른 식물만 키우는 딸이 얼마나 삭막해 보였을까 싶어서 웃음이 납니다.   

엄마가 보리차를 갖고 왔는데 물이 뿌연게 상할 듯 말 듯 합니다. 저는 안 마시겠다고 거절했는데, 그걸 엄마가 마시려고 하길래 강하게 말렸더니 "물이랑 보리가 너무 아깝잖아."라고 대답하며 기어이 드시네요. 우리 집에서 그런 말을 들으면 화가 나는데, 엄마가 주인인 공간에서 엄마의 대답을 들으니 화가 나지 않고, 엄마 입장에서는 물이 정말 아까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모든 재료들을 아끼는 엄마의 마음이 이 세상에 대한 진심이구나.. 전해져 옵니다.


몇 년 전, 친정엄마는 심한 우울증을 앓았습니다. 가족 모두 힘든 시간이었고, 엄마를 모시고 매주 병원에 다녔습니다. 저는 의사에게 물었습니다. "아이들이 외할머니와 시간을 많이 보내는 데 그게 엄마한테 안 좋을 것 같아요. 휴식이 필요하실 거 같아요." 사실 저는 엄마가 미워서 아이들을 보러 오는 엄마의 발길을 줄이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 의사 선생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거예요.

"친정어머니에게 아이들을 더 많이 보여주세요. 피곤하시겠지만, 아이들과 보내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약이 될 겁니다. 할 일이 있고, 애들 때문에 정신없이 바쁜게 친정어머니 우울증에 결코 나쁘지 않습니다."


그 의사 선생님의 착한 마음 때문인지, 시간의 힘인지, 아니면 정말 아이들의 힘인지 친정어머니는 그 터널을 무사히 안전하게 잘 빠져나오셨습니다. 제가 부탁드리지 않아도 아침마다 애들 등교하는 모습을 보러 집에 오시고, 셋째곰이 유치원 끝나는 시간만을 기다립니다. 힘들다고 투덜거리시지만, 애들이 시댁에 가는 주말에는 본인도 약속이 많으시면서 애들이 보고 싶어서 전화를 하시네요.


어둠 속에서 집으로 걸어오는 데, 엄마가 전부터 먹고 싶다던 닭갈비 집 간판이 보입니다. 엄마와 외식을 할 때, 늘 우리 기준으로 제일 맛있고 비싼 곳을 갔는데, 사실 엄마는 집으로 가는 횡단보도에서 매번 마주치는 이 닭갈비 집에 저와 가 보고 싶다고 말씀하셨어요. 무심한 곰딸은 "엄마, 나 숯불구이는 안 먹어. 엄마 친구랑 가요"

   

엄마 집 앞 횡단보도에 있는 숯불 닭갈비집. 엄마는 어떤 비싼 음식보다 이 곳에 딸과 오고 싶습니다.


친정 엄마가 우리 집을 오고 가며 매일 지나치는 이 집이 얼마나 맛있어 보였을까를 생각하니, 그냥 좀.. 먹먹합니다. '모든 걸 내 입장에서 엄마를 바라봤구나..'
연휴 끝나고 엄마와 점심 때 가서 둘이 3인분 시켜 먹어야겠어요ㅎㅎ 


엄마와 우리 집 사이에 버스 정류장이 있는데 장미꽃이 이렇게 피어 있네요. 꽃의 아름다움을 모르고 푸르딩딩한 식물만 좋아하니, 엄마는 딸이 얼마나 안타까웠을까요. 지난 봄에 베란다를 텅텅 비워놓고 싶은 제 마음과 달리 엄마가 저 몰래 우리 집 베란다에 꽃 화분을 모아 놓아서 화를 냈던 기억이 납니다. 꽃이 얼마나 예쁜지 아이들에게 보여 주고 싶으셨던 겁니다.   

엄마가 다니는 길 주위의 장미꽃들

이런 생각들을 하며 길을 걸어오다가 문득 뒤를 보았습니다. 엄마가 매일 걸어다니는 그 길이 한 눈에 보입니다. 엄마는 은행나무가 아름다워서 잎을 주워오고, 가을이면 은행을 주워와서 매번 저의 폭발버튼이 눌리는데, 엄마 입장에서는 매일 지나는 이 길에 서 있는 수십 년된 은행나무들이 정말 아름다웠겠구나.. 싶습니다.

 

엄마가 다니는 길 위의 은행나무들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가 남의 이야기가 아니네요. 좋은 드라마 덕분에 심야 시간에 엄마 집에 머물면서 엄마의 공간을 살피고, 엄마가 다니는 길 위에서 엄마의 입장이 되어 봅니다. 저는 여전히 엄마를 이해하진 못하지만 엄마가 자신에게 주어진 소중한 인생에서 자신만의 블루스를 추며 이 시간들을 즐기고 있다는 걸 이제는 압니다. 엄마 인생의 주인공은 엄마, 저와 아이들은 엄연히 조연입니다. 엄마가 멋진 주연으로 빛날 수 있게 도와야 하는 게 조연이잖아요. 엄마의 블루스가 누군가를 위한 것이 아니라 온전히 자기 자신을 위한 춤이면 좋겠습니다. 딸의 집을 오가면서 그 짧은 시간 동안 이 거리의 모든 것을 신기하고 따뜻하게 바라보는 착한 엄마가 나중에 90세, 100세가 되어 다음 우주로 넘어갈 때, 더 이상 엄마에게 가혹하지 않은 따뜻하고 행복한 세상이 열리면 좋겠습니다.


횡단보도에 서 있는 우리 엄마, 닭갈비 집을 바라보며 딸과 와서 먹어 보고 싶은 엄마, 장미꽃을 바라보며 왜 우리 딸은 잎이 크고 푸른 식물만 좋아할까 안타까워하는 엄마... 

무뚝뚝한 곰딸의 글은 이것으로 마칩니다. 


epilog

셋째곰의 개운산 소풍날. 저와 친정엄마가 막내곰의 보호자로 따라갔습니다. 그런데 아이 한 명당 보호자 한 명만 참여할 수 있어서 저는 중간에 슬쩍 빠져나왔습니다. 제가 있어야 했지만 그 소풍을 막내곰만큼 저희 친정엄마도 기다리셨거든요. 

"엄마, 뭐가 제일 좋았어?"

"은행나무에 대해서 배웠어. 은행나무는 30년이 지나야 은행을 맺을 수 있대. 그런데 애들이 그 말을 듣고 뭐라는 줄 알아?"

"뭐라는데?"

"선생님! 저요, 저 나무 알아요! 응가나무잖아요!"

은행냄새가 지독한 아이들이 은행나무를 응가나무라고 불러서 친정엄마는 너무 재미있었다며 행복해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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