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초반부터 20년 이상 혼자 여행을 안 다닌 곳이 없습니다. 동해, 남해, 산 종주, 제주도까지.
그런데 제가 유독 가길 망설여 하는 곳이 바로 서해바다입니다. 단짝친구와 선유도, 장자도 여행을 몇 번 다녀왔는데 그 곳 말고는 거의 기억이 없습니다. 바다 색, 그리고 서해바다 특유의 바람이 저와 안 맞는다고 느낀 것 같아요. 아기곰들이 어렸을 때 대천해수욕장에서 휴가를 보낸 적이 있었는데, 유독 습하고 끈적거렸던 그 기간의 날씨가 서해여행에 대한 기억으로 자리잡아 거의 10년 이상 찾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아이 친구 가족과 함께 안면도와 대천으로 1박 2일 여행을 가게 되었습니다.
여행을 떠나는 6월 6일 아침엔 비가 많이 왔어요. 비오는 건 불편하지만, 워낙 전국이 가물어서 땅이 타들어간다는 소식에 여행을 가면서도 비가 많이 오게 해달라는.. 뭔가 앞뒤가 안맞는 기원을 하면서 창밖의 비를 바라보았습니다.
서해안 고속도로 당진 방향
행담도 휴게소에 들러서 간단하게 아침을 먹고, 안면도로 출발합니다. 저한테는 여행 징크스가 있는데, 최대한 그 여행지에 대해 모르고 갈 수록 제가 그곳의 매력에 푹 빠져 든다는 겁니다. 그래서 저는 여행을 갈 때 최대한 낯선 상태에서 부딪치려고 합니다.
안면도를 들어보기는 했는데, 검색은 일부러 안하고 갑니다. 안면도 자연휴양림에 도착했는데, 높은 산은 아니지만 누구나 부담없이 산책을 할 수 있는 넓은 품의 휴양림이었어요. 아이들은 뾰족하지 않은 그 넓은 품에서 마음껏 산책하고 놀았습니다.
넓은 품을 가진 안면도 자연휴양림
곰 삼둥이와 첫째곰의 친구, 내 조카곰, 조카곰과 둘째곰, 첫째곰 친구의 동생 세 명이 또 친구
자, 이제 두번째 목적지인 대천해수욕장으로 출발합니다. 아기곰들이 대천해수욕장은 어떤 곳이냐고 물어보는데 저는 "엄청 넓어"라는 한 마디밖에 해 줄 말이 없었습니다.
안면도에서 대천해수욕장으로 이동하는 길
그렇게 서해바다에 도착하고 아이들은 갑자기 바다에 뛰어들어 물놀이를 하기 시작합니다.
비가 온다는 예보때문에 여벌옷을 안 챙긴 엄마곰. 엄마곰의 마음을 모르는 아기곰들
한참 동안 앉아 있던데 무슨 생각을 했니?
너는 우주와 지구가 만든 별이야. 엄마 눈에는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별
2~3시간을 놀다가 배가 고파서 그제서야 숙소로 들어갑니다. 숙소 안에는 이미 맛있는 라면과 고기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어른곰들은 익숙하게 신문지를 깔고, 아기곰들의 식사를 차립니다.
물놀이 후에 샤워하고 먹는 늦은 점심, 라면과 차돌박이
다 먹고 나서, 쉬다가 우리는 일몰시간을 확인하고 다시 바다로 출발합니다. 기대는 없었습니다. 날이 점점 흐려지고 있고, 구름이 바다 위에 눕기 시작했거든요.
대천해수욕장 입구
대천해수욕장 입구에 도착해서 흐린 하늘 아래에 누워있는 바다를 바라보는데... 할 말을 잃었습니다.
하늘과 바다 사이에서 불타오르는 태양
대천해수욕장의 일몰
가슴에 손을 얹고 말씀드리지만 저는 정말 기대도 하지 않았습니다. 서해바다는 저에게 무언가를 기대하게 만드는 그런 여행지가 아니었거든요. 어두운 바다와 구름 사이에서 오늘의 마지막을 불태우는 저 태양빛을 아기곰들은 아무 말 없이 바라봅니다.
아빠곰과 사춘기 아기곰
둘째곰과 조카곰은 모래놀이를 시작합니다.
우리가 서 있는 곳이 지구 자전의 힘으로 태양에서 벗어납니다. 지구는 공평해서 지구 위의 어느 곳이든 태양빛을 골고루 받을 수 있게 부지런히 움직입니다. 지구의 움직임을 생각하면, 이 별은 생명을 잉태하고 키우고, 살리기 위해 모든 힘을 쏟고 있는 것 같습니다.
숙소에 돌아오자마자 아기곰들은 싸이 노래를 틀고 군무를 추기 시작합니다. 춤과 노래는 사람들의 마음을 입체적으로 빚어냅니다. 아이들은 그 누구도 의식하지 않고 자신들의 마음을 춤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아기곰들이 언젠가 이 글을 읽게 되면, 너의 인생은 너 밖에 살아낼 수 없으니 너 이외의 변수들이 생겨도 해결은 하되, 흔들리지는 말라고 이야기 해 주고 싶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의식하지 말고, 다른 사람들의 기준으로 너를 판단하지 말고, 오직 네가 치열하게 고민해서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들을 해방시켜 가라고 이야기해주고 싶습니다.
싸이의 댓댓 댄스가 오늘 여행의 마지막 풍경
새벽 6시에 눈을 떴는데, 내 동생곰이 아침바다를 보러 가자고 합니다. 서해에서 바라보는 아침바다는 상상이 안 되지만 묵묵하게 따라 나섰습니다.
6월 7일 아침 6시, 짙은 블루를 그라데이션 해 놓은 듯한 대천해수욕장의 새벽 풍경입니다. 바다 빛깔은 하늘과 습도, 기온, 바람의 변수로 매일 매일 달라지기 때문에 어느 바다색이 좋다고 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저 멀리 쫓겨가는 새벽의 어둠이 바다와 하늘위로 자신의 발자국을 남긴 듯한 새벽의 대천바다 풍경에 한참 동안 지배당할 것 같습니다.
아빠곰은 30살이나 어린 아기곰을 이기기 위해 악착같이 게임을 합니다.
새벽 바다를 보고 싶지 않다는 아이들의 결정을 존중하고, 오락실로 향합니다. 아이들이 게임하는 걸 보면서 '나도 나중에 혼자 오락실 가서 게임 실컷 하고 와야지'라고 깊이 다짐하는 저는 철 없는 엄마곰입니다.
숙소를 정리하고 서울로 올라가는 길. 우렁쌈밥이 맛있다는 <우렁이박사>식당에 가서 이른 점심을 먹었습니다. 식당 이름이 입에 붙지 않아, 아빠곰은 "지렁이 식당까지 몇 키로 남았어?" 엄마곰은 "구렁이식당 거의 다 왔어."라고 우리의 하찮은 기억력을 극복하지 못하고 남의 상호를 막 변형시킵니다.
맛있는 지렁이 식당 아니 구렁이 식당 아니 진짜 이름은 우렁이 식당
서울에 도착하니 1시 조금 넘었네요. 아이들을 학원에 내려주고 집에 올라와서 짐을 정리합니다. 1박을 혼자 보낸 래브라도 리트리버 오레오는 한참동안 졸졸 따라다니며 말을 겁니다.
어서오시개, 보고 싶었다개, 악수부터 하시개
밤에 누웠는데 잠이 안 오네요. 고마웠습니다.
서해바다는 아름답지 않다고 느낀 여행자에게 서해바다가 말을 걸어줘서 고마웠습니다.
일몰의 서해바다...지구의 자전으로 내가 서 있는 곳이 태양에서 벗어날 때 오늘 하루 최선을 다해 살아낸 태양의 강렬함.
일출의 서해바다... 동쪽바다에서 비추는 태양이 서쪽바다의 어둠을 내 몰 때, 바다와 하늘 위에서 흩어지는 새벽 블루의 그라데이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