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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맘디터 Sep 12. 2022

만만하게 보다가 큰코다친 유명산

유명산 정상을 코 앞에 두고 눈물을 쏟다

동생이 유명산 자연휴양림 캠핑장으로 저를 초대했습니다. 캠핑장으로 친숙한 산이기에 가벼운 마음으로 갔고, 인터넷에서 몇 개의 글을 검색해보니 정상까지 1시간 내외로 짧고 쉽다는 말에 트래킹을 결심합니다.

1리터짜리 물 하나 달랑 챙겨서 발목 등산화가 아닌 경등산화를 신고, 스틱 없이 오후 2시 58분, 등산로에 진입합니다.  

등산로 입구에 이렇게 써 있습니다.

"하절기에는 오후 3시 이후 정상 등산을 금지합니다."

출발시간이 마음에 좀 걸렸지만 한 시간 코스쯤이야 하면서 과감하게 출발합니다. 그런데 하산하는 분들의 표정이 심각합니다. 한라산 관음사 코스, 지리산 벽소령 너덜길에서 마주치는 트래커들의 표정을 하고 있는 겁니다. '뭐지..'

그리고 몇 분 올라가다 보니 등산로에 이런 푯말이 써 있습니다.

"산이 험하고 낙석의 위험이 있으니 등산을 자제해 주시기 바랍니다."

내 평생 등산로에서 "등산을 자제해 달라"는 푯말을 보기는 처음입니다.

어리석은 저는 이 때까지도 상황을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ㅜ.ㅜ

유명산 등산로에서 제일 완만한 미니 구간


잠시 후, 밧줄에 의지하지 않고는 오르기 어려운 길이 하염없이 계속 나타납니다. 화산을 오르는 것처럼 오르막길만 나오는데, 등산하면 안되는 산에 억지로 길을 만들어 놓은 것 같은 고난이도의 코스가 계속 이어집니다.

저는 드디어 뭔가 잘못됐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유명산은 미끄러운 흙길과 고각으로 이루어진 코스여서, 발목을 보호하는 등산화와 스틱이 필수였습니다. 저의 경등산화는 흙길에서 하염없이 미끄러지고, 스틱이 없는 상태에서 제 발목과 무릎은 저의 체중을 버티느라 낑낑대기 시작합니다.


한 시간만 오르고 되돌아 온다는 생각이었기에 어떻게든 오르고 또 오르는데, 바위랑 씨름하면서 올라가다가 산에 해가 지고 있다는 걸 너무 늦게 발견했습니다 ㅠ.ㅠ

오후 4시 10분. 뒤를 돌아보는데, 그 오후 시간에 유명산 등산로는 어둠이 내리기 시작합니다.

유명산은 등산로 초입 푯말처럼 등산로가 결코 안전하지 않은 데다가, 각도가 너무 가파르고, 하필 저는 난시가 심한 눈이여서 어두운 상태에서 발을 디뎌야 하는 높이를 잘 가늠하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4시 15분, 정상을 100미터 앞에 두고 하산을 시작했는데, 이미 저는 땅의 높이가 잘 보이지 않아서 발을 헛딛기 시작합니다. 바지는 붉은 흙 뒤범벅이 되고, 이번에 새로 구입한 노스페이스 경등산화의 코팅재는 나뭇가지와 바위에 뜯겨 나갑니다.

바위 밧줄 구간은 멘붕이 와서 찍을 생각도 못함. 저 흙들이 너무너무 미끄러워서 등산화가 필수입니다~


결국 핸드폰을 꺼내서 만약 내가 못내려갈 경우에 대비해서 위치추적은 잘 되는지 확인하고, 죽은 나뭇가지를 지팡이로 의지한채 온갖 신음소리를 내며 하산합니다. 사람은 한 명도 없고, 점점 어두워지는 등산로에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집니다. 어두워지는 산에서 등산로와 샛길은 구분이 더 어려워집니다.

'그 인플루언서를 가만두지 않겠어'   

전날 남편에게 서운한 일이 있어서 혼자 출발했는데, 등산의 고난까지 남편에게 날카로운 화살이 되어 날라갑니다.

'당신! 이번에는 결코 결코 넘어가지 않겠어 ㅠ.ㅠ'

이렇게 산에 오르는 것만큼 내려가는 게 곤혹스러운 등산로에서 한참 후에 20대 등산객 3명을 마주쳤습니다. 너무 반가워서 저 혼자 엄청 빨개진 얼굴로 그들을 보며 활짝 웃었습니다.(그 분들은 공포스러웠겠죠 ㅜ ㅜ)


하산하는 길 모퉁이에 등산객들이 모아놓은 나무 지팡이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습니다. 저처럼 유명산을 만만하게 보고 준비 없이 올라갔다가 고생한 분들의 세심한 배려 같아요.

(그걸 보는 순간, 우리나라 트래커들에 대한 자부심이 뿜뿜했어요ㅋㅋ)


그렇게 저는 하산을 마치고, 망연자실 널부러져 버렸습니다. 제 동생 일행에게는 저의 실수를 이야기할 용기가 나지 않아서 그냥 잘 다녀왔다고 말했는데, 마음속으로는 "오르막아, 이제 헤어져"라고 수없이 외칩니다. 오르막이 싫은데, 항상 산에 올라가는 저의 이중적인 마음이 제발 하나로 모아지기를 바랍니다ㅎㅎ


동생 텐트에서 세상 제일 맛있는 삼겹살과 소고기를 구워 먹었습니다.

겨우 2시간 등산이었는데도 지리산 종주를 한 것처럼 초췌한 저의 모습에 일행은 알쏭달쏭한 표정을 짓습니다. 아무 준비 없이 대책없이 올라갔다가 계속 미끄러지고 다치고, 나중에는 눈물까지 터졌다는 말은 끝까지 끝까지 비밀로 할 겁니다~~

하루가 지난 지금도 일상에서 날카로운 허벅지 통증 때문에 수시로 원망의 외마디 비명을 지릅니다.

"으악! 너 유명산!"


그래도 깊고 아름다운 유명산아, 조만간 만반의 준비를 하고 이른 아침 햇살과 함께 남편이랑 찾아갈게~~~~

밝고 화사한 정상에서 만나자*^___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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