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랑 같이 숲여행 가면 금요일 학교, 금-토 학원, 모든 숙제 다 빼줄게~~~엄마랑 숲으로 가자~~~ 엄청 멋진 한옥에서 잘거야."
"싫어, 학교 학원 안 가도 숙제와 시험은 어차피 남아있어. 엄마가 해결 못해줘"
저는 속으로 생각합니다.
'아니 벌써, 인생을 이렇게 통관했단 말이야!'
너무도 현실적이고 냉정한 첫째곰, 둘째곰의 거절과 다르게 8세 막내곰은 하루동안 고민하다가 엄마와 여행을 가기로 결심합니다.
막내는 여덟살 인생 처음으로 엄마와 단둘이 시간을 갖습니다. 금요일 아침, 짐을 싸서 강남 수서로 출발해 저의 단짝친구를 태우고 강릉으로 출발합니다.
송정해변에 도착하니 바다의 온도와 바람, 습도, 햇빛이 만들어낸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집니다.
여행을 많이 다니지만 이런 바다색은 정말 오랫만에 만나는 것 같습니다. 이 모든 것을 허락한 자연과 시간, 저의 상황에 감사 또 감사할 뿐입니다. 여행을 다니면 나의 현재에 대해 감사함을 느끼게 됩니다. 나를 자유롭게 이동시켜주는 두 다리, 내 인생의 여백에 존재하는 시간들, 공기와 흙, 나무와 바람과 물, 하늘이 만들어내는 눈 앞의 모든 풍경들. 어느 하나 우연이 없고 당연하게 주어지는 것이 없습니다.
바다 앞에서 우리집 막내는 누구의 딸, 누구의 동생에서 벗어나 자연 대 자연으로, 독립된 존재로 서 있습니다. 수 천, 수 만의 시간이 이 아이를 관통하기 위해 숨죽여 기다리는 숨결도 느껴집니다. 아이들 앞에서 더욱 조심하고 겸손해져야 한다는 지혜가 바다에서 제게로 흘러 들어옵니다.
이제 바다에서 숲으로 이동합니다. 강릉에서 2시간에 걸쳐 굽이진 산간도로를 지나니 삼봉휴양림 진입로가 시작됩니다.
한옥집을 처음 경험한 아이는 흥분상태로 여기저기 뛰어다닙니다. 저도 너무 신기하고 차가우면서 아늑한 그 공간의 힘에 잔뜩 흥분합니다.
남편 없이 제 생애 첫 숯불을 피우고, 고기와 채소로 맛있는 저녁식사를 합니다.
저는 남편이 숯불을 피울때마다 왜 저렇게 멍하니 앉아있는건지 이해를 못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직접 피워보니까 숯불을 피우는 시간의 반은 열과 불이 차가운 숯에 잘 전달되도록 기다리는 시간이라는 걸 알았습니다.
불을 휘저으며 차가운 숯에 따뜻한 열과 빛이 잘 전달되도록 시간을 화로 안으로 호호 불어봅니다.
깊은 숲 속의 태양은 어두움에게 금새 자리를 내어줍니다. 초저녁에 아이와 잠들고 우리는 아침을 맞이하였습니다.
일어나자마자 눈앞에 펼쳐진, 어제와 다른 숲을 바라봅니다. 어제와 오늘은 모든 것이 다릅니다. 맞이하는 시간도, 나의 마음도, 태양과 기온, 바람도 모두 다릅니다. 숲의 색깔과 냄새, 움직임이 다른 것도 너무 당연합니다.
아침 산책에서 만나는 삼봉휴양림은 물소리와 새소리가 가득합니다. 자연이 주인이고 사람들은 잠깐 오가는 엑스트라정도로 느껴지는 원시림입니다. 이곳이 우리나라의 허파가 아닐까 생각될 정도로 숲이 내뿜는 청량한 밀도 높은 공기가 내 코와 기관지, 폐속으로 들어가고, 그것도 부족해 하염없이 숲 밖으로 밖으로 넘쳐흐릅니다.
저는 사실 막내와 단 둘이 시간을 보낸 적이 거의 없어서 우리 둘은 서로가 서로에게 어떤 모습일까 궁금했습니다.
우리 모녀는 저 숲 위를 흐르는 시냇물처럼 유쾌하고 즐겁고 서로에게 안심을 주었습니다. 나뭇잎에 반사되는 햇살처럼 아이는 눈부신 존재였고, 저는 그 햇살이 더욱 반짝이길 바라는 숲처럼 아이 뒤에 하염없이 서 있었습니다.
나무에 피어있는 함박꽃을 보며, 이제 사춘기로 들어가며 엄마와 거리두리를 시작하는 우리집 첫째곰 둘째곰의 얼굴도 떠오릅니다. 저와 남편은 한그루의 함박나무처럼 소리없이 그 귀한 함박꽃을 바라봅니다.
제가 만난 깊은 원시림 깊은 숲 속에 나와 아이들의 모습이 있고, 우리 가족들의 모습에도 숲 속의 햇살, 시냇물, 바람과 새소리가 들어 있습니다.
우리와 숲은 서로 다르지 않습니다. 내게서 숲을 발견하고, 숲에서 나를 발견하는 순간, 나와 숲의 힘은 연결됩니다.
이달에 해수면 온도가 몇 도 높아졌다는 기후위기의 소식이 계속 들려옵니다. 가끔은 모든 힘을 가진 사람들이 원망스럽고, 아무 힘이 없는 제 자신도 원망스럽습니다. 다만 제 직업을 통해 이렇게 한글자 한글자 써내려가며, 누가 들어도 듣지 않아도 제가 서 있는 이 자리에서 나와 타인, 지구생명의 위대함을 노래해 봅니다.
그리고 누군가 또 다른 누군가, 힘이 있건 없건 자신이 서 있는 그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말하고 또 말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