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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ei Aug 16. 2021

[한라산] 안갯속, 여름의 영실코스

등산기. 제주 한라산

지난달, 모처럼 한라산을 올랐다. 산은 푸르고 하늘은 흐린 날이었다. 브런치에도 흔적을 남겨두기로 했다. 영실코스는 봄과 가을에만 올라봤다. 여름은 처음이었다. 가을의 영실코스가 좀 더 화려한 느낌이었지만, 여름의 뜨겁고 눅진한 공기도 인상적이었다.

영실 탐방로 입구에 주차했다. 시기가 시기라 그런지, 주차장은 한산했다. 영실코스는 길이 비교적 평탄하고 데크가 잘 깔려있다. 특별히 난이도 있는 구간 없이 무난하다.

백록담으로 가는 길은 출입제한구역이라 남벽분기점까지 간다. 하산 시 돈내코나 어리목 탐방로로 내려가는 방법도 있지만, 차를 가져온 관계로 영실 탐방로로 원점 회귀하였다. 날씨 때문인지, 산에 사람은 많지 않았다. 비가 내리다 멈추다를 반복한 덕에 데크가 조금 미끄러웠다. 하지만 산행 내내 다행히 우산이나 우비가 필요할 만큼 비가 내리지는 않았다. 고요했고 종종 물소리와 빗소리가 들렸다. 평화로운 산행이었다.

물소리가 들리고, 꽃잎은 젖어있고, 나뭇잎들은 모두 청량했다. 고도가 높아질수록 나무들의 키도 낮아지고 특유의 생태계가 나온다. 마치 도심 비둘기처럼 천연덕스러운 까마귀도 데크 곳곳에 앉아있었다.

원래 병풍바위도 보고, 산을 구경하며 올라가야 할 길이나 이 날 기상상태로 인해 그저 하얀 하늘 구경을 하며 전진해야 했다.

구름이 짙어지니 물속을 걷는 듯했다. 뭔가 말을 하고 싶어 하는 듯한 헐벗은 나무들도 나타난다. 하지만 들리지 않으니 들을 수가 없다. 이쯤 왔으면 윗세오름 대피소가 가까워진 것이다. 해발 1700미터. 잠시 쉬어갈 수 있는 데크가 나온다. 인증샷을 찍고 잠시 숨을 돌리고 과일을 먹었다.

윗세오름 대피소를 지나고 나면 남벽분기점까지 탁 트인 전망이 펼쳐진다. 이제 평탄한 길을 가볍게 오르내리며 남벽분기점까지 가게 된다. 약 2km. 말 그대로 구름 속을 걸었다.

드디어 남벽분기점 전망대. 기념촬영을 하고 쉬어갈 수 있는 데크가 마련되어 있다. 전망대에서 한 숨 돌리고 있노라니 다행히 구름이 좀 걷혔다. 돌산 꼭대기가 우아한 색과 선을 드러낸다. 저 너머에 백록담이 있다.  

하산길은 시야가 트여서 산세가  였다. 색도 쨍해지고, 젖어있는 풀도  푸르게 빛난다.     산은 생명력이  강해지는 듯하다.  맑아지긴 했지만  아래까지  보이지는 않았다.

하산길도 몽환적이었다. 그저 푸른 벌판 위의 하얀 길, 하얀 하늘. 눈앞에 보이는 것들이 단순하니, 생각이 단순해진다. 덕분에 동행과의 대화도 뚜렷이 기억이 난다. 잊지 못할 이야기였다.

사진 속 숨은 사람 찾기. 자연 앞에 가져다 놓으면 사람 참 작고 왜소하다. 그리고 도시에선 전혀 반갑지 않은 이들도 산길에선 반갑다. 점점 맑아지는 하늘과 함께 내려오는 길도 조용했다.

차분히 왔던 길을 다시 따라 내려가서 원점회귀. 조용한 산책을 한 것 같은 산행이었다.

안내도에 따르면 영실에서 남벽분기점까지 소요시간은 2시간 30분. 이 날 시간이 얼마나 걸렸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데, 원점회귀를 위한 왕복에 4시간~4시간 반 정도가 걸린 기억이다. 작년 이맘때와 비교하면 체력이 현저히 좋아졌다. 오르고 내릴 때도, 다음 날도 평안했다. 날씨가 좋지 않거나 산행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도 무리하지 않고 다녀올 수 있는 코스다.

해지기 전까지 시간이 넉넉하게 남아 모처럼 앤트러사이트 한림에 들러서 커피 한 잔. 날씨에 딱 어울리는 카페였다. 아직 등산 끝의 막걸리가 맛있는 나이는 아닌 모양인지, 역시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최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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