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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ei Aug 04. 2020

마지막 여정, 기나긴 8코스

[서울 둘레길 완주기 9] 8코스 북한산 코스

서울 둘레길 8코스는 길 자체는 어렵지 않지만 완주가 쉽지 않은 코스다. 일단 대부분 접근성이 좋았던 다른 코스들에 비해 이 코스는 서울 어디서 가도 멀다. 게다가 코스 길이가 무려 34.5킬로미터. 소요 예정시간이 17시간이고 총 5개 세부코스로 나눠져 있다. 스탬프도 6개나 찍어야 해서 집중이 필요하다. 체력이 좋은 사람의 경우 2번에 나눠 걸어도 가능하겠으나, 보통이라면 최소한 3번 이상 나눠서 도전하는 게 좋다. 8코스는 대부분이 북한산 둘레길과 겹친다. 북한산 둘레길 완주와 병행하기 좋다. 


8코스를 떠올리면 한숨부터 나온다. 서울 둘레길이 뭔가 서울시의 지원을 받으며 당당하게 걷는 느낌이었다면 8코스는 북한산 국립공원에 세 들어 사는 느낌이었다. 국립공원 내에는 둘레길 리본을 달 수 없게 되어 있어서 둘레길 목숨줄 같았던 주황색 리본이 없어졌다. 민가(?)로 내려오는 구간에는 일부 리본이 있긴 한데, 이게 상당히 헷갈린다. 북한산 둘레길 이정표에 익숙해지는데도 시간이 걸렸다. 

내 경우엔, 서울 둘레길과 북한산 둘레길 스탬프를 동시에 진행하려다가 처음에 낭패를 겪었다. 북한산 인증에 집중하다가 한 번은 서울 둘레길 스탬프 우체통을 놓쳐서 공연히 북한산을 한 번 더 갔어야 했고, 또 한 번은 북한산 인증에 익숙하지 않아 사진 인증 장소를 놓쳐서 한 번 걸었던 코스를 두어 시간 다시 걷는 사고도 있었다. 원래도 길치인 데다 두 가지를 동시에 신경 쓰려니 발생한 일. 똑똑한 사람들이라면 문제없을 것. 

북한산. 멀었다. 버스를 두세 번씩 갈아타거나, 버스와 지하철, 경전철을 갈아타는 등 여러 방법을 선택했다. 덕분에 코스에 가는 길이 이미 여행처럼 느껴졌다. 어쩌면 평생 가볼 일 없을지 모르던 곳까지 가게 되었으니 여러 가지로 좋은 일이었다. 

8코스와 겹치는 북한산 둘레길의 가장 큰 장점은 정비가 잘 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코스마다 구간안내 문도 있고, 바닥 정비도 잘 되어 있어서 위험한 길이 거의 없다. 대부분이 산길인데도, 특별히 위험한 길이 없었다. 전반적으로 평탄하고 계단도 상당히 많은 구간에 깔려있고 특히 바닥 정비가 잘 되어 있다. 등산보다는 쉽고, 일반 산책로보다는 어려운 난이도의 길이 연속적으로 이어진다. 단점을 꼽자면, 다른 코스에 비해서 비교적 단조롭다는 것. 어디서 사진을 찍어도 길이 비슷비슷한데, 생각보다 랜드마크가 될만한 지역도 많지 않다. 

8코스는 걷는 구간도 길지만, 집에서 멀다 보니 도시락도 필요했다. 코스와 코스 사이에 식당에 들어갈 수 있는 경우가 있지만 그 위치와 시간을 미리 예측할 수 어렵기 때문에 가방에 한 끼 정도는 챙겨 다녔다. 멀다는 얘기를 반복하긴 하지만, 세상 어느 도시에 이렇게 잘 정비된 산과 숲이 있을까 생각해보면 참 가까운 곳이다. 해가 떠있는 동안 당일에 다녀올 수 있는 좋은 숲길이다. 

그중 인상 깊게 남는 곳 중의 하나가 솔밭공원, 그리고 국립 4.19 민주묘지다. 솔밭공원은 둘레길 사이 민가(?)를 지날 때 나오는 시원시원하게 뻗은 소나무들이 아름다운 공원이었다. 날씨가 좋던 날이라 마스크를 쓴 동네 사람들이 잔뜩 몰려와 있어서 어딘지 푸근한 분위기였다.

그리고 길을 걷다가 한쪽을 내려다보니 보였던 4.19 묘지. 어딘가 있다는 건 알았지만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라 한참을 바라보게 되었다. 하얗게 뻗은 기둥이 청아하고 서늘해 보여서 오래 기억나는 장면이다. 

길을 걷다 보면 은평구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포인트들이 곳곳에 있다. 서울에서, 그것도 지하철역에서 멀지 않은 곳이긴 하지만 아무래도 북한산이다 보니 봉산이나 아차산 같은 동네산 느낌은 아니다. 곳곳에 멧돼지 경고와 야생동물 포획틀이 있는 등 "아, 산이구나"하는 느낌을 준다.

장마시즌에 다니다보니 불볕더위와 비 오는 날이 오갔는데 덕분에 계속 물소리가 아주 좋았다. 더위와 습도, 모기가 단점이긴 하지만 7월도 둘레길 걷기에 참 좋은 때더라 생각했다. 계곡 물소리를 들으면서 걸은 것도 좋은 기억이었다.

그런데, 8코스에 대해 꼭 남겨두고 싶은 말이 있다. 가이드북이건 어디건 쓰여 있지 않는 중요한 사실이다. 내게 배신감을 안겨준 코스, 둘레길에 회의를 느낀 그 코스. 그건 바로 평창 마을길이다. 북한산 둘레길로는 6코스에 해당하고 서울 둘레길로는 8-2코스에 해당한다. 여긴 한여름에 갈 곳이 못 된다. 꼭 알아두자. 

땡볕에!! 구름 한 점 없고!! 벤치고 뭐고 잠시 쉴 곳도 없으면서! 편의점이나 수도가 공급되지 않는!! 무작정 무작정 아스팔트 오르막만 두어 시간 이어지는 길이다. 하필 너무너무 더운 날에 갔고, 아스팔트 열기를 그대로 맞으면서 쉬지 않고 오르막을 올라야 했다. 

배신감이 들었다. 아니야. 나의 서울 둘레길은 이렇지 않아!! 내게 이런 시련을 줄 리가 없어. 길이 예쁘거나 강이나 숲, 공원이 보이거나 해야지 이게 뭐야. 왜 나를 무작정 이런 시련에 빠트리는가? 탈진하는 줄 알았네. 잠시도 쉴 곳이 없어서 주차된 차들 사이에 잠시 쪼그려 앉거나 기적적으로 발견한 마을 버스정류장 아래 벤치에서 잠시 쉬었다. 여기는 기사 딸린 차로 오가는 것에만 적합한 곳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리고 전망... 각 주택의 주거자들에게는 멋진 전망이 보이겠으나, 이 동네를 그냥 지나가면 전망이라고는 단독주택밖에 없다. 단독주택의 마당이 엿보이는 때가 있는데, 그 틈을 통해서 야, 집에서 보면 전망이 좋겠구나 하고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물론 동네 구경하는 재미는 있었다. 흥미로운 건축물들이 많이 모여있었고. 하지만 구경은 차를 몰고 와서 하는 게 좋겠다. 꼬질꼬질 땀 흘리며 등산가방을 메고 걸어가자니 좀 머쓱하기도 하고 뭐랄까, 기생충의 한 장면이 떠오르면서 뭔가 '출근하는' 기분이 들어서 미묘했다. 난 누구고 여기는 어디인가 뭔가 이 낯선 기분.

가장 높은 곳에 오를 즈음 돌아보면 산에 빼곡하게 숨어있는 평창동이 한눈에 보이는 포인트가 있다. 차를 몰고 올라와서 본 풍경이라면, '여기 한 번 살아볼까?' 싶은 생각이 들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여름 뙤얕볕 아래 걸어 올라온 나는 '아니다, 여기서 살 수 없다'며 세차게 머리를 흔들었다. 동네에 어째 잠시 기댈 벤치 하나 없어. 야박하다 야박해. 다들 자신의 성에 들어가서 사는 구간인 것 같았다.

하여간 평창 마을 구간에서 약간의 원한이 생긴 것 외에는 8코스는  대부분이 무난하고 시원한 숲길이 었다. 

도봉탐방지원센터에서 마지막 스탬프를 찍고 두 달간의 서울 둘레길을 완주(정확하게는 완보)했다. 때는 7월 24일이었다. 방향치에 거의 바닥인 체력으로 시작했기에 마무리하는 순간 참으로 기뻤다. 스스로에게 칭찬을 해주었다. 소회는 따로 포스팅할 예정이다.


북한산 둘레길도 7월에 완보하였다. 겹치는 구간이 있어서 아래 포스팅을 함께 링크해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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