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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원 Aug 12. 2015

우연의 즐거움 1

기대하지 않았던 우연을 마주했던 순간

선데이업 마켓, 올드스피탈즈 마켓, 브릭레인 마켓 등 Bathnal역 근처의 유명 마켓들을 쭉 구경하며 돌아다니다 해가 질 무렵 숙소로 돌아가기 위해 23번 버스를 탔다.


어딜 가던, 내가 동양인이라서, 신기해서 그런지 돌아다니다 보면 자꾸 시선들이 느껴진다.


하긴, 그럴 만도 하다.

작고 어려 보이는 (서양인들 눈에는 동양인들이 원래 나이보다 더 어려 보인다고 한다. 게다가 나는 한국에서도 나이보다 어리게 보는 편이다.) 동양 여자애가 혼자서 여기 저기 돌아다니니 신기해한다고 해서 이상할 건 없었다.


선데이업 마켓, 올드스피탈즈 마켓, 브릭레인 마켓

나는 23번 버스 1층 뒷자리에 앉았다.

이 때까지만 해도 아직 2층으로 올라가기는 낯설어 주구장창 1층에만 앉았더랬다.


한참 창 밖의 풍경들을 바라보며 가고 있는데 버스가 정류장에 멈췄다.

사람들이 차례로 버스에 올라타고, 마지막에 한 덩치 큰 남자가 탔다. 그런데 이 남자, 갑자기 다짜고짜 버스를 타면서 욕을 엄청 하는 게 아닌가.

무슨 이야기인지 정확히 듣지는 못했지만, 우리가 익히 아는 F로 시작하는 그 단어(F*ck)는 내 귀에 확실히 들렸다.

아무래도 카드에 돈이 다 떨어져서 버스 카드가 찍히지 않는 거 같았다.

기사 아저씨가 그냥 자리에 앉으려는 그 남자에게 무어라 말을 했다. 아마 카드를 찍지 않으면 버스에 타지 못한다고 했겠거니 싶다.

(아, 영국 버스는 현금을 받지 않는다. 반드시 오이스터 카드(영국 교통카드, 한국의 티머니라 생각하면 된다)를 찍고 탑승해야 한다.)

그러자 갑자기 그 남자가 기사 아저씨에게 다가가더니 언성을 높이면서 보호 칸막이를 쾅- 내리쳤다.(영국 버스는 기사 아저씨 자리에 직접적으로 절대  접근할 수 없도록 전체적으로 투명 칸막이가 설치되어 있다.)

그러더니 굉장한 욕설과 함께 버스 안에 침을 퉤- 뱉었다.


짧은 순간, 버스 안에서 적어도 1층에 앉아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주목되었고, 나도 갑작스런 상황에 조금 무서웠다.

다행히 그 남자는 어마 무시한 욕과 함께 버스에서 내렸고, 버스는 다시 출발했다.


그런데 바로 다음 정거장에 버스가 멈추자마자 기사 아저씨가 다들 내리라고 안내 방송을 했다.

영문을 모르는 사람들은 이게 무슨 일이야?라는 표정을 지었고, 나도 마찬가지였다.


하나, 둘 버스에서 사람들이 내리기 시작했고, 나도 어쩔 수 없이 버스에서 내려야 했다.

한 승객이 기사 아저씨에게 무언가를 이야기하더니, 기사 아저씨가 영수증 같은 종이를 아주 길게 끊어 주었다.

알고 보니 그 종이는 다음 버스에 탈 때 보여주면, 이전 버스에 문제가 생겨 도중에 내렸으니 공짜로 태워줘라 같은 티켓이었다.


승객들 모두 그 긴 영수증을 차례로 잘라서 나눠 갖고 버스에서 내렸다.

설상가상 어두웠던 하늘에서 비가  한두 방울씩 오기 시작했고, 바람도 꽤 세찼다.


버스에서 도중에 내리게 된 우리들(나와 승객들. 같은 처지에 그 순간만큼은 '우리'라고 느껴졌다.)은 버스 정류장에 옹기종기 모여 비를 피하며 다음 23번 버스가 오길 기다렸다.


10분, 20분...

다른 버스들은 몇 대씩 지나간 듯 한데 '우리'의 23번 버스는 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하염없이 버스를 기다리던 중, 어딘가에서 종소리가 들렸다.


근처에 성당이 있나?


소리의 근원지를 찾아 두리번거리는데, 정류장 바로 맞은편에 큰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이럴 수가! 세인트 폴 대성당이었다.



원래 오늘 마켓 투어를 마치고 들리려 했지만, 동선이 맞지 않아서 다음을 기약했던 곳인데, 바로 내 눈 앞에 세인트 폴 성당이 있었다.

이런 우연이!


어쩌면 이번 여행에서 세인트 폴 대성당은 보지 못 할 수도 있었는데, 버스 사고로 우연히 내린 정류장에서 이렇게 마주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St. Pauls Cathedral   세인트 폴 대성당

누가 알았겠나, 내가 탄 버스에 왠 덩치 큰 남자가 타서 욕을 하고 침을 뱉고, 도중에 버스가 멈춰서 생뚱맞은 곳에 내리게 되고, 알고 보니 그 곳이 다음을 기약할 뻔한 곳이었을 거란 걸!


비록 바람은 세차고, 날씨는 우중충했지만 내가 탄 버스가 멈춰 선 것도, 도중에 엉뚱한 곳에 내리게 된 것도, 우연히 세인트 폴 대성당을 발견한 것도. 모두 나에겐 즐거움으로 다가왔다.



이런 게 여행의 매력 아닐까.


예기치 못한 상황을 맞닥뜨리는 것.


그리고 그 우연들의 즐거움을 경험하는 것.





우연히 마주한 세인트 폴 대성당.
그 앞을 지나가는 영국의 상징, 빨간색 이층 버스.
그렇게 한참을 지나가는 버스들을 보며 우리의 23번 버스를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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