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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원 Sep 02. 2015

우연의 즐거움 2

예상치 못한 우연이 예상치 못한 즐거움으로 다가온 순간

런던에서의 4일째, 새롭게 드는 생각 중 하나는
'내가 상황을 통제할 수 없다면 그냥 지금 이 상황, 이 순간을 즐기자'라는 것.

상황은 내가 어찌 할 수 없지만, 그 순간에 있는 나의 마음은  컨트롤할 수 있으니깐.
언제나 '마음가짐'이 참 중요한 것 같다.

영국에서의 일정 중 근교 여행을 딱 한 곳 계획해 놓았다. 런던에서의 넷째 날이 바로 계획한 근교 바스(Bass)에 가는 날이었다.

여행 계획을 세우며 런던의 근교 중 어느 곳을 갈지 무척 고민했다. 마음 같아서는 천천히 모든 도시를 다 돌아보고 싶었지만, 나에게 영국에서의 시간은 한정되어 있었다.

마지막까지 옥스퍼드(Oxford)와 바스를 두고 여기저기 인터넷 서칭을 하고, 다녀온 사람들에게 물으며 고민하다가 결국 중세 분위기의 매력에 끌려 바스를 택했고, 한국에서 미리 바스 행 왕복 기차 티켓을 예약해 놓았다.


이 티켓 예약도 참 할 말이 많다. 나는 메가버스(Mega Bus)를 이용하려 했는데, 이 메가버스가 참 매력 있게도 모든 티켓의 제일 처음 구매자에게는 단돈 1파운드(한화 약 1,700원)라는 돈으로 예약을 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가지고 있다. 나는 한 푼이라도 아껴야 하는 처지였기에 '바스 행 왕복 티켓 1파운드 구매!'라는 행운을 잡기 위해 하루에도 몇 번씩 사이트에 들어가 티켓이 풀렸나 확인하고는 했다.

이런 노고(?) 끝에 나는 1파운드의 행운을 거머쥘 수 있었다. 왕복 총 2파운드라는 헐 값에 근교를 다녀올 수 있게 된 것이다.


넷째 날, 바스 행 열차를 타러 가기 위해 아침 일찍 일어나 씻고, 나갈 채비를 했다. 생각보다 일찍 준비를 마친 덕분에 모처럼 여유 있는 아침을 맞았다. 아니, 그런 줄 알았다.


채비를 마치고 나가기 전 핸드폰 지도를 확인하려고 하는데, 조금 전까지 잘만 되던 핸드폰이 멈춰버렸다. 전원 버튼을 꾹- 눌러봐도, 유심칩을 뺐다 끼워봐도 아무 작동을 하지 않았다. 기차 시간은 다가 오는데 이러다간 열차를 놓치고  바스는커녕, 어쩌면 유럽여행을 이쯤에서 마쳐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구글맵과 GPS 없이 나는 눈 뜬 장님이나 다름없었다.)

갑자기 애가 타기 시작했다. 이게 무슨 일이람. 늦잠을 자서 열차를 놓친 것도 아니고, 갑자기 핸드폰이 고장 나서 열차를 놓치게 생겼다니.


'제발 되라, 되라..'

마음속으로 수없이 외쳤지만, 핸드폰은 좀 쉬자는 듯, 다시 작동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야속하게도 시간은 계속 흘러갔고, 선택을 내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택 1. 핸드폰 지도 없이 유스턴 역으로 가서 열차를 타고 바스로 향한다.

선택 2. 바스를 포기하고 핸드폰을 들고 애플 스토어(Apple Store)를 찾아 간다.


1번을 택한다면, 전 날 유스턴역에서 기차를 타 봤으니 기차역까지는 헤매지 않고 찾아 갈 수 있을 거다. 물론 바스에 도착하고, 다시 숙소로 돌아오기까지는 나도 장담할 수 없는 여정이 될 거 같았다.

2번을 택한다면, 바스는 다음 그 언젠가를 기약해야 했고, 애플 스토어를 찾아간다 해도 핸드폰을 다시 고칠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고민 끝에 결국 나는 2번을 택했다. 바스를 가지 못하는 건 아쉽지만, 그것보단 앞으로의 여정을 생각했을 때 핸드폰을 살리는 게 우선이었다.

같은 방 룸메이트 중 하나인 아일랜드 친구 Sally에게 사정을 이야기하고, 숙소 근처 애플스토어에 어떻게 찾아가야 하는지 검색을 부탁했다. 빠름 빠름 빠름 LTE 속도에 익숙해진 나에겐 너무나도 답답한 영국 데이터 속도였다. 한국에서는 검색만 하면 바로 나오는 인터넷 서칭인데, 10분이 넘어가도록 계속 검색 결과를 기다려야 했다.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기에 나의 부탁이 귀찮을 수도 있었을 텐데 그녀는 친절하게도 끝까지 도움을 주려고 했다. 

긴 인내심 끝에 드디어 숙소에서 스토어까지의 루트가 검색되었다. 솔직히 지도를 봐도 감이 잡히지를 않았다. 과연 내가 찾아갈 수 있을까? 싶었지만 Sally에게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일단 길을 나서야 했다. 그녀가 찾아준 지도를 보고 최대한 루트를 외운 후 숙소를 나섰다. 나의 기억력과 감을 총동원해야 했다.


애플스토어(Apple Store)를 찾아 걷고 또 걷다가 우연히 마주한 공원.
사람들로 북적이는 옥스퍼드 스트릿과는 또 다른 분위기였다. 우연히 마주친 이 공원에서 잠시 원래의 목적을 잊고  이곳저곳 사진에 담기 시작했다.

혼자 앉아 책을 읽고 있는 사람, 나무에 기대 신문을 읽는 사람, 일을 하다 잠시 동료들과 휴식을 취하는 사람.
색다른 여유로움에 잠시 오늘 아침 핸드폰 소동이 잊힐  뻔했다.

그 순간이 참 좋았다. 숙소에서 나와 매장을 찾아 나서면서 속으로 '길을 잃는 것도 즐기자'라고 생각하며 걸었는데 나는 정말 길을 잃었고, 우연히 마주한 공원에서 여유로움을 발견할 수 있었다.

얼마나 헤맸을까, 돌고 돌아 우여곡절 끝에 드디어 애플 스토어를 찾았다. 하지만 10시에 오픈한다는 직원의 말에 나를 포함해 조금 이른 시간에 매장을 찾은 사람들 모두 문 앞에서  대기해야 했다. 10시에 점점  가까워질수록 놀이기구 줄을 선 것 마냥 사람들이 바글 바글 해졌다. 스토어는 정말 딱 10시 정각에 문을 열어 주었다.

매장에 들어가서 이리저리 묻고 또 묻고 헤매다가 결국에는 스토어 매니저가 직접 핸드폰을 리셋해 주었다. 매니저는 "내가 일단 리셋을 해줄게. 만약 그래도 안된다면 저쪽으로 가서 수리를 받아야 해."라고 말했다. 내가 쩔쩔 맺던 것과는 달리 매니저가 핸드폰을 리셋하는 방법은 아주 간단했다. 전원 버튼과 홈버튼을 동시에 길게 눌러주면 되는 것이었다. 이럴 수가..

다행히도 내 핸드폰은 부활했다. 만약  그때 수리를 받아야 했다면 무척이나 막막했을 거다. 정말이지 핸드폰이 돌아왔을 때는 죽다 살아난 기분이었다. 


스토어에서 나와 원래 일정은 취소되었으니 무얼 할까 생각하다가 원래 다음날  가려했던 노팅힐(Notting Hill)에 가기로 결정. 바로 버스를 타고 노팅힐로 향했다.

남는 게 시간이다 보니 걷고 또 걸으며 천천히 여유부림을 만끽했다. 노팅힐 마을 깊숙히 들어갈수록 피카딜리나 옥스퍼드 스트릿의 활기와는 상반되는 한적함과 여유가 느껴졌다.



영화 <Wild>에 나왔던 대사 중,

"예상한 일에도 완벽한 대비는 불가능하다."라는 말이 있다.

이 날, 계속 이 대사가 생각났다. 누가 예상했겠는가. 핸드폰이 고장 나서 예약해놓은 바스 행 열차를 타지 못하게 될 줄.

원래의 계획과는 조금 다른 하루가 됐지만, 별로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재미있었다. 즉흥적으로 오게 된 노팅힐 거리도, 카페에서 핸드폰을 충전하며 다이어리를 적는 순간까지도 그저 모두 신선한 즐거움으로 다가왔다.

핸드폰 배터리를 충전하러 들어간 카페. 런던에서의 색다른 여유가 참 소중하다고 느껴졌다.


런던에서의 4일째, 새롭게 드는 생각 중 하나는 

'내가 상황을 통제할 수 없다면 그냥 지금 이 상황, 이 순간을  즐기자.'라는 것.

상황은 내가 어찌 할 수 없지만, 그 순간에 있는 나의 마음은  컨트롤할 수 있으니깐. 언제나 '마음가짐'이 참 중요한 것 같다.





영국스러운 건물들


허밍버드 베이커리 발견! 그 유명한 레드벨벳 컵케이크를 드디어 먹어보는구나!


레드벨벳 컵케이크. 생각보다 훨씬 더 매우 많이 정말 달았다.



1 파운드샵. 한국에 있는 다이소 같은 매장. 전 품목이 모두 1파운드이다.
식물사랑 울 엄마 위해 꽃씨 한 팩 구매. 지금 아주 잘 자라고 있다.



그저 발 길이 닿는 대로 정처 없이 걷던 노팅힐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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