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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가 환영받지 못하는 사회

사유하는 인간으로 살아간다는 것

by 고밀도

무언가에 대해 깊이 고찰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의 고유 영역이고, 인간을 더 인간답게 하는 활동일 것이다. 하지만 바삐 돌아가는 현대 사회에서 사유의 자리는 점점 위태로워지고 있다. 이 시대는 시간이 걸리는 일을 참지 못하고 즉각적인 대응을 원한다. 특히, 시스템 안에서 굴러가는 조직과 그 안에 일하는 회사원에게는 사유는 사치로 치부된다. 그것은 가시적이지 않고, 바로 결과로 이어지지 않을뿐더러 수치화하기 어렵다. ‘사유’의 과정이 필요하다고, 그래야 깊이 있는 일을 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순간, 경쟁력을 잃고 만다. 그뿐인가? ‘00 씨는 생각이 너무 많아.’ ‘아주 철학적이야.’라는 칭찬을 가장한 욕은 보너스다. 속 뜻은 ‘쓸데없이 생각을 하지 말고 상사의 요구사항 즉각적으로 해결하고, 타자를 두드려 보고서를 완성하라는 뜻이다.


몸집이 거대한 기업일수록 점점 ‘수명 업무(*受命:명령을 받음)’가 중요해진다. 회사는 점점 시스템을 갖추게 됨과 동시에 다양한 직급과 직책의 상사들(CEO, 팀장, 부서장 등등)이 있기 마련이다. 그들이 각자의 입장에서 던지는 오더(명령)와 요구사항을 해결하느라 많은 직원들의 시간과 에너지를 투입된다. 이런 종류의 업무는 빠르게 수행해서 결과를 ‘늦지 않게’ 보고해야 하는 업무이므로 사유하는 순간, ‘행동이 굼뜬’ 직원으로 낙인찍힐 수밖에 없다.


자발적으로 시작한 일이 아닌 명령으로 시작된 일에는 창의가 들어갈 틈이 없다. 새로운 도전과 시도는 사치다. 당장은 사유 없이 수명 업무를 빨리 쳐내는 것이 현명한 의사결정처럼 보이지만 장기적으로는 명령에 의존적인 업무 환경을 만들게 된다. 한국의 기업은 자발적으로 일하는 실리콘 밸리의 문화를 선망한다. 혁신을 만들어 내는 그들의 업무는 ‘속도’가 아니라 ‘사유’에 있다. 작은 시장의 보이스, 작은 생각들도 지나치지 않고 가설을 만드는 데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인다. 대표적인 Agile 방식도 구체적인 문제 해결 목표가 있은 뒤, 다양한 시도를 다양한 관점으로 해보면서 문제의 실마리를 찾는 데에 중요점이 찍힌다. 실리콘 밸리의 업무 방식을 벤치마킹한다고 하면서 우리가 업무 속도에만 초점을 맞춘다면 그것은 핵심을 잘못 파악한 것이다.


생산성과 효율을 강조하는 사회에서는 사유는 설 자리가 점점 좁아진다. 특히, 사유하는 직장인의 삶은 쉽지 않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사유 없이는 가진 것들이 금방 바닥이 나고 새로운 것을 찾게 되는 순간을 만난다. 인간의 인생과 조직의 혁신에는 반드시 사유가 필요한다. 버티기가 필요한 시점이다. 사유하는 사람의 반짝이는 생각이 필요한 그 시점은 반드시 올 것이다. 조직에서 기회가 오지 않더라도, 사유가 함께하는 인생은 그렇지 않은 인생보다 훨씬 풍요로울 것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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