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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겉과 속이 다른 사람입니다.

글을 쓰는 이유

by 고밀도

마음이 평온한 사람보다 속이 시끄러운 사람이 그것을 풀기 위해 글을 쓸 수밖에 없다고들 한다. 나 역시 속이 부대껴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 꽤 오랜 시간 동안 왜 나는 평온한 마음을 가질 수 없는지에 대해 억울하다는 생각을 하다가 때로는 난데없이 ‘팔자’를 원인으로 귀결시키곤 했다. 특히, 마흔 되어서는 남은 여생도 이 부대낌과 동행해야 하는지 의문이 들어 이따금씩 스스로를 타인처럼 살펴보았는데, 뜻밖의 이유를 발견하게 되었다.


오랜 고민이 무색하게 그 실마리는 예상치 못하게 전달받은 A4 종이 한 장이었다. 아이는 학교에서 받았다며, ‘녹색 어머니회 교통 봉사활동’라고 적힌 공지사항을 건넸다. 맨 위에 적인 굵은 글씨로 나의 미간은 절로 찌푸려졌다. 여자 CEO나 대통령이 나와도 누구도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이 시대에 ‘녹색 어머니회’라니, 아직도 그런 말이 존재하는지를 처음 발견한 나는 종이를 들고 재택근무를 하는 신랑에게 달려갔다. ‘여보, 이 종이 좀 봐봐. 어디 이상한 거 없어?’ 다행히 신랑은 내가 원하는 답을 해주었지만 대수롭지 않은 듯 말했다. ‘관행일 뿐이야. 신경 쓰지 마.’ 하지만 저 단어는 나를 며칠 동안 거슬리게 했다. ‘그날 당신이 가줘야겠어.’라는 말을 남기고 방을 빠져나왔다.


녹색 어머니회’가 불편했던 것은 ‘세상이 바라보는 어머니’와 ‘내가 생각하는 어머니’가 달랐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아직도 잊지 못하는 학습통지서의 한 문구가 있다. 초등학교 6학년 때의 일인데 ‘매사에 여성스러움’이라는 단어였다. 얼마 전 나를 멈추게 했던 ‘녹색 어머니회’처럼 그 문장에 불편함을 느꼈다. 그 당시는 아들만 바라시는 할머니에게 내가 얼마나 ‘아들’과 다르지 않은 지에 대해 명절마다 열을 올리던 때였다. 이런 일은 내가 속한 집단안에서도 어김없이 벌어진다. 종교 활동을 할 때에도 전통적으로 여성에게 요구되는 봉사활동을 해주길 나에게 기대한다. 회사에서는 보직장이 바뀔 때마다 하나같이 약속이라도 한 듯 나에게 ‘분위기를 밝게’하는 역할을 요구한다. 대체로 나를 상사의 말에 의문을 품지 않는 유수한 부하직원으로 보는 것이다.


종이 한 장에 적힌 단어에도 며칠 동안 속이 부대끼는 사람이니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여과 없이 받아 들 일리가 없다. 내 사고의 프로세스는 순종, 수용과 거리가 멀다. 내 안에서는 의문과 질문이 밀려든다. 전형적이고 전통적인 어떤 역할에 얽매이지 않으려 애를 쓰지만 나에게 기대되는 것은 내 안에 있는 성격과 정 반대의 것이었다. 사람은 생긴 대로 살아야 한다는 말이 있는데 나는 생긴 대로의 속마음을 가지지 못했기에 괴로웠던 것이다. 가끔 매서운 눈매로 성형을 해볼까 고민을 하기도 했다. 성형에 용기를 내지 못하고 날카로운 아이라인을 그리면 내가 원하는 이미지를 가질 수 있을까 하고 워터프루프 아이라인을 여러 개 구매해 봤지만, 타고난 얼굴의 구조가 눈 밑을 까맣게 만들어 줄 뿐이다. 호랑이가 되어보려다 판다가 되고 만다. 이쯤 되니 사람들이 나와 겪고 나면 종종 하던 ‘어머, 너 의외다!’라는 말을 내가 왜 좋아했는지 알 것 같다. 그것은 나의 의외의 모습이 아닌 내 진짜 모습을 발견해주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나는 오늘도 겉모습과 달리 노는 속 마음이 부대껴 글을 쓴다. 글을 쓰게 만들어준 나의 겉과 속의 다름이 고통이 아닌 축복이라는 아름다운 결론을 내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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