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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취향

내 주변에 호구들이 가득한 이유

by 고밀도

얼마 전, 2022년의 다이어리를 창고에 넣었다. 옆에는 20대부터 매년 써온 다이어리가 다양한 컬러로 세워져 있다. 그 어느 때보다 한 해가 빠르게 흘렀다는 아쉬움에 20대의 1년을 꺼내어 어떻게 살았는지 다이어리를 들춰봤다. 곳곳에 ‘모임’이 어찌 그리도 많은 지, 뼛속부터 외향적인 인간이 살아갈 법한 일상이 들어 있다. 그 시절 나는 모임의 이름을 정하는 것을 즐겨했나 보다. B.A.B모임(세 명이 모이는데 두 명은 B형이고, 한 명은 A형이다.) 영친영우(영원한 친구, 영원한 우정의 줄임말이다.), 뷰티 컬리지 모임(애드 컬리지라는 광고 동아리 친구들인데 미용이야기로 하나 된 그룹이다.) 등이 있고, 기억이 가물가물한 모임들도 잔뜩 일정에 꽂혀 있다. 기억을 더듬어 보니, 당시 나는 인맥이 나를 더 좋은 곳으로 데려가 줄 거라 믿었다. 다양한 모임들에 내가 껴 있었다. 다양한 사람과의 교류가 내 인생에 풍요를 주었다고 믿었지만, 그렇게 사람들을 만나고 온 날은 침대에 쓰러져 잠이 들었다.


지난 12월은 연말을 보내며 좋아하는 사람들을 만났다. 한껏 규모가 작아졌지만 일 년 중 가장 사회활동을 활발히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너지가 소진되지 않고 채워지는 느낌은 20대와의 가장 큰 차이점일 것이다. 기분 좋은 만남을 하고 온 날, 사람들의 얼굴을 하나씩 떠올려보니 주변에 남아 있는 사람들이 너무도 비슷했다. 어쩜 하나같이 ‘호구력’을 자랑하는지, 호구유니버스 대회가 있다면 경쟁이 매우 치열할 것이다. 그 안에서는 더 이상 ‘총무’를 도맡아 하지 않아도 되었고, 노력하지 않아도 사람들의 경험을 자연스럽게 공감할 수 있다. ‘왜 내 주변에는 호구가 가득하지?’ 싶지만, 결국 그런 사람들이 나의 ‘사람 취향’인 셈이었다. 나에게 확고한 취향이 있다는 것에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나의 ‘사람 취향’. 앞뒤가 다르지 않고, 가식이 없는 사람. 타인의 감성을 읽는 사람. 정치적이지 않은 사람.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아내는 사람. 나는 확실하게 그런 사람들을 좋아한다. 비슷한 사람들과 있을 때 가장 나답고 편안하다.


여기에 나는 한 가지 결심을 더 했다. ‘새로운 인간관계를 더 이상 만들지 않겠다는 것’이다. 자연스럽게 새로운 사람들과 만나고 헤어질 수 있겠지만, 인위적인 노력을 하지 않겠다는 의미다.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과 협력하는 일을 하며 밥벌이를 해야 하기 때문에 내가 노력하지 않아도 새로운 사람들과 만나고 헤어진다. 하지만 이제는 나의 네트워킹을 단단히 하기 위한 노력은 하지 않기로 한다. 친절한 미소로 새롭게 명함을 주고받을 뿐이다. 지금 주변에 남아있는 사람들을 지키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부족하다. 시간이 한정되어 있다고 생각지 못했던 20대에는 새로운 만남이 주는 설렘이나 자극을 기대했지만, 지금은 사람취향에 맞는 사람들과 보내는 시간이 주는 위로와 안정감이 소중하다.


연말과 새해를 맞이하여 다양한 모임의 기회가 생기고 있지만, 나는 나의 사람들에게만 집중하기로 한다. 하나의 원칙이 생기니 선택을 확실히 할 수 있다. 취향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것이다. 이제는 ‘제가 고상한 취향은 없어도, 사람취향은 확고합니다.’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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