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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포진과 엄마를 잃은 사람은 닮았다.

by 고밀도

아스팔트에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던 날이었다. 그때 나는 수두라는 것에 걸렸다. 학기 중에도 수두를 걸려 나오지 않던 친구들을 기억하고는 왜 하필 여름 방학에 걸려버린 건지 입을 삐죽거렸다. 약치고는 제법 어여쁜 수두약을 얼굴과 몸에 바르고 한동안 집에 머물렀다. 일하느라 바빴던 엄마는 중간중간 집에 들러 나를 살폈고, 검은 봉지 안에 설탕이 잔뜩 묻은 꽈배기 도넛을 건네고 다시 계약자를 만나러 갔다.


다시 수두를 재회한 것은, 처음 만났을 때처럼 더위를 견디기 어려운 여름이었다. 이번 여름은 집을 수리하는 관계로 한동안 집이 아닌 다른 곳에서 편치 않은 잠자리를 하고 있었다. 피로가 피로를 덮어 몸에서 일어나는 반응에 둔감했다. 마침 이마에 생긴 뾰루지가 눈에 띄었다. 좀처럼 뾰루지는 나지 않았기에 이상기후가 가지고 온 무더위 탓이라 생각했는데 하루 사이에 이마를 따라 줄지어 퍼져갔다. 머리를 쥐어짜는 두통까지 동반되어 병원을 찾았다. 3차 신경선을 따라 생기는 대상포진이라며 약을 지어줬다. 통증이 강하게 찾아와 진통제를 복용하며 일상을 보냈다. 자연스럽게 이런 쓴맛을 준 대상포진을 밤낮으로 검색했다.


대상포진은 수두에 걸린 사람의 감각신경 안에 잠복해 있다가 발병하는 바이러스라고 한다. 평소에는 평범하게 잘 지내다가 면역이 떨어지거나 피로가 누적이 되면 존재감을 드러낸다. 나는 엉뚱하게도 대상포진이 엄마를 잃은 사람의 상태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느 질병처럼 시간이 지난다고 완전한 치유가 되는 것이 아니라 감각신경에 특정한 입력 값이 들어가면 발병한다는 점이 유사했다. 대상포진은 피로라는 값, 엄마를 잃은 사람들은 마음의 고됨이나 특별한 날을 특정값으로 한다는 것이 달랐다.


엄마 없이 보낸 지 2년이 넘었지만 내게는 시간이 약이라는 말이 와닿지 않는다. 물론 슬픔이 나를 잠식해서 웃지 않고 지내던 날보다는 나아졌지만 한번 슬픔이 몰려들면 엄마를 오늘 잃은 것처럼 울었다. “엄마! 하고 소리 내어 불러 보고 숨겨 놓은 세상사 중 딱 한 가지 억울했던 그 일을 일러바치고 엉엉 울겠다.” 이는 정채봉 시인의 ‘엄마가 휴가를 나온다면’이라는 시 중 일부다. 천국에 있는 엄마가 생각나는 순간들을 표현한 시에 나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명절 때나 기념일 같은 때에도 엄마 생각이 나지만, 특히 세상 억울한 일을 당한 날,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일러바칠 수 없는 날이 가장 그렇다. 엄마에 대한 그리움이 항시 감각신경에 잠복해 있다가 그런 상황에서 발병이 되고 마는 것이다.



갑자기 약속이라도 한 듯 회사 일, 집안일, 서류 처리 마감일 등이 한꺼번에 몰렸던 적이 있다. 체크리스트를 적으며 빠짐없이 하려고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그래도 모든 것이 잘 마무리되어 간다고 생각했는데, 일은 그때 터졌다. 은행에 입금하려고 따로 빼어 둔 돈이 사라진 것이다. 거액은 아니었지만 당장 그 돈이 있어야 일이 마무리될 터였다. 온 집안을 다 뒤지고 나의 기억을 수십 번 되돌아봤는데, 출퇴근길 어딘가에 흘렸다는 결론이 났다. 좀처럼 하지 않는 실수였다. 누구를 원망할 수도 없었다. 나는 오랜만에 엉엉 울었다. 돈을 잃어버린 억울함도 있었지만, 이런 상황에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나의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일러바치고 싶은 욕구가 치밀었기 때문이다. 엄마는 아마도 ‘괜찮아, 인생에서 그런 일은 비일비재해. 너무 울지 마라. 너는 울면 눈이 퉁퉁 붓잖아.’라고 말해주었을 거고 나는 ‘응, 그래서 냉동고에 숟가락을 얼려 놨지.’하고 금방 회복했을 것이다.


요즘 출퇴근 길 라디오, tv광고에 마동석의 목소리가 귀에 꽂힌다. ‘평생 3명 중 1명은 대상포진을 경험합니다.’ 나는 그 말을 엄마를 잃은 사람들은 나처럼 몸속에 슬픔이 잠복해 있겠구나라고 바꿔 생각한다. 그럼 내가 아직까지도 자주 울보가 되는 것이 이상해 보이지 않게 된다. 나는 그저 엄마를 잃은 사람들 몸속에 잠복하는 슬픔 바이러스 보유자일 뿐이니까 말이다. (마동석 땡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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