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그 시절 우리의 '웨건'

엄마의 리어카

by 고밀도

어느 날 우리 집에 웨건이 생겼다. 6살인 나와 4살 동생이 앉을 수 있는 넉넉한 크기에 아득한 공간이었다. 그리고 간식으로 200ml 우유가 항상 구비되어 있었다. 24살에 첫 아이인 나를 낳은 엄마는 아직 20대에 머물고 있었다. 가녀린 나의 엄마는 아름다웠다. 그런 아름다운 엄마가 끄는 ‘웨건’이 무척 좋았다. 동생이 있어서 엄마에게 안기고 싶어도 안아 달라는 말을 못 했는데 웨건에 앉으면 엄마 품에 안긴 것 못지않게 따뜻했다. 우리 동네 구석구석을 웨건을 타고 다녔다.

그날은 벚꽃이 날리던 따뜻한 봄날이었다. 그날도 엄마는 웨건으로 우리를 데리러 어린이 집으로 왔다. 우리의 웨건은 일광욕을 했는지 안쪽으로 들어가 앉으니 구들장처럼 따뜻했다. 그때는 풍성했던 엄마의 머리카락이 경쾌한 걸음에 맞춰 출렁이고 있었다. 엄마는 그날 수금 날이라고 우리에게 어린이 집 옆에 있는 작은 마트에서 과자 한 봉지를 사줬다. 가벼운 꽃잎처럼 하늘을 둥실둥실 나는 기분으로 나와 동생은 웨건에 앉아 봄 날을 즐겼다. 행복했다. 그때 누군가 엄마를 불렀다.


“00야! 너 00 아니니? 웬일이야, 너 **시로 이사 왔구나. 우리 언니가 이 근처로 이사 와서 언니 보고 가는 길이었는데, 너를 보다니. 이게 몇 년 만이니?”


엄마는 잠시 웨건 손잡이를 아래로 내려 멈췄다. 웨건이 기울어진 덕분에 엄마와 엄마 친구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특별한 날이 아니면 화장을 하지 않는 엄마인데, 엄마는 화장을 하지 않는데도 볼터치를 한 것처럼 볼이 불그스레했다.


“응, 나 신랑이 이 근처 00 공단에 큰 회사에 취직했어. 다행히 일이 잘 되어서 애들 키우면서 집에 있었는데 너무 심심해서 취미로 소일거리 하면서 지내고 있지.”


엄마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긴 생머리에 반질반질한 트렌치코트를 입은 엄마의 친구는 웨건 안에서 빤히 쳐다보고 있는 우리를 보고 1000원씩 쥐어 주었다. 이것이 웬 횡재인가. 나와 동생은 무척이나 행복했다. 엄마와 엄마 친구는 짧은 대화를 나누고는 헤어졌다. 엄마는 다시 손잡이를 들어 웨건을 끌었다. 물 빠진 청바지에 모자가 달린 하얀 점퍼를 입은 엄마의 반대편으로 엄마의 친구가 트렌치코트를 휘날리며 멀어지고 있었다.


집에 온 엄마는 말이 없었다. 무표정한 얼굴로 우리에게 저녁에 된장찌개를 해주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유선방송이 하는 시간이 되어 동생과 나는 TV 앞에서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장롱과 TV만이 덩그러니 놓인 단칸방, 한쪽에 고개를 숙이고 나가야 하는 작은 문이 하나 있고, 문을 열면 아빠의 키가 천장에 닿을 것 같은 작은 주방이 있었다. 아니, 주방 겸 세면대 겸 샤워실이 있는 집이었다. 엄마는 방과 복합공간이 연결된 문을 열어놓고는 저녁 준비를 했다. 엄마의 어깨가 왜 흔들리는지 알지는 못했지만 엄마가 수금 날인데도 기분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2차 성징이 나타날 때에야 나는 우리가 탔던 것이 웨건이 아니라 우유배달 리어카였다는 것을, 엄마가 보험 아줌마가 되기 전에 우유배달 아줌마로 새벽배달을 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날 엄마는 친구를 만나 반갑기도 했지만 허름한 리어카를 끄는 자신의 모습을 옛 친구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아직 미혼인 친구의 화려함과 자유함이 아이 둘을 리어카에 싣고 가는 자신의 책임감과 대비되었던 것일까?


나에게는 우리 동네의 골목골목을 누비게 해 주고, 그 안에서 간식을 먹을 수 있었던 멋진 웨건이었지만 엄마 아빠에게는 삶의 고단함을 상징하는 리어카였다는 것을 그때의 나의 나이와 같은 6살 아들을 키우면서 깨닫고 있는 중이다.


다시 돌아간다면 그 작은 부엌으로 가서 흔들리던 엄마의 어깨를 안아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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